최승희의 무용영화 <대금강산보>1937217일의 경성 조선호텔에서 열렸던 관광협회 간담회에서 처음 제안되어, 1939217일의 파리 시사회를 끝으로 기록에서 사라졌다.

 

이후 50년 동안 <대금강산보>는 잊혀졌다. 초기의 평전 저자들도 <대금강산보>를 몰랐다. 서만일의 <조선을 빛내고저(1958)>와 다카시마 유사부로의 <최승희(1959)>에도 이 영화는 언급되지 않았고, 다카시마 유사부로가 <최승희(1981)>의 재판을 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10여년이 더 지나서 출판된 강이향의 <생명의춤 사랑의춤(1993)>도 자전적 영화 <반도의 무희(1936)>에 대해서는 비교적 길게 서술했지만, 불과 2년 후에 개봉된 <대금강산보(1938)>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다.

 

1939년 2월17일 <대금강산보>가 상영되었던 파리의 살드예나 극장. 이후 이 영화에 대한 기록은 발견된 바 없다.

 

평전 중 처음으로 <대금강산보>를 언급한 것은 정병호(1995)이다. 파리 시사회 이후 이 영화가 기록에서 사라진 지 56년만의 일이었고, 정병호의 가장 큰 공헌이다. 정병호는 다카시마 유사부로와 공동 편집한 사진집 <세기의 미인무용가 최승희(1994)>에서도 <대금강산보> 로케이션 기간에 촬영한 최승희의 사진 5장을 수록했다. 이 사진들에 붙여진 설명은 불충분하거나 잘못된 것도 있지만, <대금강산보> 촬영 과정과 경로를 추적할 수 있는 단서가 되었다.

 

김찬정(2002)도 정병호(1995)를 인용하지 않고서 독자적으로 <대금강산보>를 서술했지만, 그는 일본 신문기사 하나에 지나치게 의존한 단점이 있다. 이후 정수웅(2004)과 강준식(2012)<대금강산보>를 언급하기는 했지만, 정병호와 김찬정의 서술을 인용한 것이 대부분이다.

 

강준식(2012)의 평전이 출간된 지 5년 후인 20175, 필자는 유럽취재를 통해 <대금강산보>가 파리에서 상영되었던 사실을 찾아낼 수 있었다. <대금강산보>8개의 최승희 무용작품이 삽입되어 있다는 점도 밝혀냈다. 그밖에도 <대금강산보>의 줄거리와 배역, 각 배역을 담당한 배우들을 밝힐 수 있었다. 이같은 사실은 2018년에 연재한 필자의 취재기에 언급되었고, 이 글에서도 좀 더 자세히 서술되었다.

 

최근의 조사로 최승희의 무용영화 <대금강산보>에 대한 많은 것이 알려졌으나, 그 필름의 소재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필자의 조사에서 발견된 가장 중요한 점은 <대금강산보>의 제작 의도를 밝혀낸 것이었다. 최승희가 이 영화를 자신의 세계 순회공연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려고 했던 점은 기존의 평전 저자들이 잘 지적하고 있다. , 최승희는 해외 공연 전에 이 영화를 미리 상영함으로써 관객들이 조선무용에 대한 선이해를 갖기를 바랐고, 평론가들도 조선무용의 아름다움을 이국적이라는 관점 뿐 아니라 미학적관점에서 감상하고 비평해 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와 함께 필자는 조선 총독부가 최승희와 전혀 다른 관점에서 <대금강산보> 제작에 나섰던 사실을 밝혀낼 수 있었다. 총독부의 강조점은 금강산에 있었다. 해외 관광객을 유치하려는 것이 근본 의도였던 것이다. <대금강산보>는 조선총독부의 상시적인 재정적자를 메우기 위한 방편으로 고안되었고, 1940년 도쿄 올림픽을 찾는 구미의 관광객들을 조선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홍보물로 사용하고자 했던 것이다.

 

최승희와 총독부는 <대금강산보>를 둘러싸고 서로 다른 꿈을 꾸고 있었지만, 이 영화의 제작에 최선을 다했다. 최승희는 바쁜 공연 일정에도 불구하고 영화 촬영을 위해 일본과 조선을 여러 차례 오가면서 음악과 안무, 촬영과 편집과 시사회에 참여했다. 총독부도 철도국과 외사과를 동원해 최승희의 영화제작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그러나 총독부와 최승희의 의도는 둘 다 실현되지 못했다. 19377월에 터진 중일전쟁 때문이었고, 그 여파로 1940년 도쿄 올림픽이 취소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같은 대형 악재가 터지자 <대금강산보>에 대한 총독부와 영화사의 관심은 퇴조했지만, 최승희는 끝까지 이 영화를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파리에서 시사회를 갖기에 이르렀다.

 

이 글은 <대금강산보>에 대한 희소하게나마 남아 있는 문헌을 중심으로 사실을 기록한 것에 불과하다. 앞으로 이 영화에 대한 자료가 더 발견되면 더 구체적인 사실들이 서술될 수 있을 것이다. <대금강산보>에 대한 연구는 이제부터 시작일 지도 모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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