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희의 무용영화 <대금강산보>에 대한 조사를 계속하면서 어쩌면 이 영화가 칸 영화제에 출품되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런 주장을 담은 문헌이나 증언을 접한 적은 없다. 그렇지만 조사를 진행할수록 그 생각이 떠나지 않았던 것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정황 때문이다.
첫째, 최승희는 프랑스의 새로운 영화제가 조직되던 시기에 프랑스에 체재했고, 1938년에 개봉된 극영화 <대금강산보>의 필름을 수중에 가지고 있었다. 더구나 그는 조선과 일본을 제외한 세계 어느 지역에서나 이 영화를 상영할 권리도 보유하고 있었다.
최승희는 또 파리 시사회를 통해 <대금강산보>를 유럽에서 상영한 바 있다. 어쩌면 이 시사회는 유럽 상영을 증명하기 위한 행사로 조직되었을 수도 있다. 이로써 <대금강산보>는 프랑스에서 조직되는 새로운 영화제에 출품할 수 있는 기본적인 여건을 갖춘 것이다.
둘째, 최승희가 칸과 비아리츠에서 공연을 기획했다는 점이다. 칸 공연은 1939년 2월26일, <카지노 뮈니시팔> 극장에서 열렸다. 1939년 상반기의 칸은 새로운 영화제 열풍에 휩싸여 있었다. 경쟁도시인 비아리츠를 제치고 영화제를 칸으로 끌어오기 위한 치열한 로비도 전개 중이었다. 새로운 영화제가 한창 화제가 되고 있었던 칸의 들뜬 분위기 속에서 최승희는 조선무용을 공연했던 것이다.
한편 최승희는 비아리츠에서도 공연을 열기로 되어 있었다. 6월28일자 <바이온, 비아리츠, 바스크 가제트(Gazette de Bayonne, de Biarritz et du Pays basque)>는 최승희의 비아리츠 공연이 9월14일로 예정되었다고 발표했다.
1936년 센서스에 따르면 프랑스 도시 인구는 파리(3백만명), 마르세유(90만명), 리용(57만명)의 순서였고, 보르도(26만명)와 니스(24만명), 툴루즈와 비아리츠(각 21만명), 낭트와 릴레(각 20만명), 스트라스부르(19만명)과 르아브르(16만명)가 뒤를 이었다. 칸의 인구는 5만명이었다.
최승희가 파리(1월31일)와 마르세유(3월1일)에서 공연을 가진 후, 인구가 더 많은 다른 도시들을 제치고 칸(2월26일)과 비아리츠(9월14일)에서 공연을 기획했던 것은 흥행 이외에 다른 고려가 있었다는 뜻이다. 칸과 비아리츠는 둘 다 새로운 영화제의 최종 후보지였다.
특히 비아리츠 공연일은 9월14일이었는데, 이는 9월1일부터 20일까지로 결정된 새로운 영화제 개최기간에 포함되어 있었다. 당초 결정대로 비아리츠가 개최지로 확정되었다면, 영화제가 한창 무르익을 때 최승희의 무용공연이 열렸을 것이다. 그와 함께 무용영화 <대금강산보>가 영화제의 출품작으로 상영되었다면 이는 흥행이나 홍보의 면에서 최상의 상황이었을 것이다.
최승희가 <대금강산보>를 유럽 영화제에 출품하려고 노력했다면, 베니치아 영화제보다는 칸영화제를 선호했을 것이다. 일본의 동맹국인 이탈리아와 독일이 주도권을 잡은 베네치아 영화제가 유리했을 수는 있다. 정부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던 베네치아 영화제에 일본 정부의 도움을 받았다면 더욱 손쉬웠을 수도 있다.
그러나 최승희와 안막은 전체주의 국가의 예술 관행과 거리를 두었다. 최승희가 이탈리아와 독일, 그리고 독일의 영향아래 있던 오스트리아에서 공연하지 않은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제1회 칸영화제의 출품작 40개의 명단에는 <대금강산보>가 포함되지 않았다. 또 1939년의 베니스 영화제에 출품된 13개 외국영화 출품작 명단에도 <대금강산보>는 없었다. <대금강산보>가 베네치아와 칸 영화제에 초청받지 못했던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유럽 상영이 단 한차례 시사회에 그쳤기 때문에 영화제 조직위의 주목을 받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그것은 <대금강산보>에 유럽어 자막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중일전쟁 발발로 <대금강산보> 제작이 4개월 지연되는 바람에 해외 상영용 필름에 자막을 달지 못한 결과는 이렇게 길고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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