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희의 무용영화 <대금강산보>는 1939년 2월17일의 파리 시사회를 끝으로 문헌에서 사라졌다. 이후 이 영화가 다시 상영되었다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다. 세계 순회공연 기간뿐 아니라, 순회공연을 마치고 귀국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파리 살드예나 극장 시사회 이후 <대금강산보>의 필름은 의상과 악기, 소품과 축음기 등과 함께 샹젤리제의 스튜디오에 보관되었음에 틀림없다. 전운이 감돌자 최승희는 8월 말경 파리 외곽의 바노성으로 숙소를 옮겼지만 스튜디오는 그대로 유지했다.

9월1일 전쟁이 터지고 일본 대사관으로부터 대피령을 받자 최승희는 숙소와 스튜디오를 철수해 보르도로 갔다. 제2피난선 카지마마루(鹿島丸)는 9월7일 보르도에 입항했지만, 순회공연을 이어가고 싶었던 최승희는 승선을 포기하고 기차 편으로 로마로 향했다. 

 

무용영화 <대금강산보>의 필름은 1939년 2월17일 시사회 이후 샹젤리제에 위치한 최승희 무용 스튜디오에 보관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환승을 위해 마르세유에 내린 최승희는 일본 영사관으로부터 이탈리아도 참전할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더 이상 순회공연을 계속할 수 없음을 깨달은 최승희는 마르세유에서 제3피난선 하코네마루에 승선했다. 이 배는 9월18일 마르세유를 출발, 10월25일에 뉴욕에 도착했다.

최승희는 1939년 말부터 미국 공연을 재개했고, 1940년의 남미공연으로 이어졌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우루과이와 칠레, 페루와 콜롬비아, 에콰도르와 멕시코 공연을 마치고, 1940년 11월24일 샌프란시스코에서 다츠타마루(龍田丸)에 승선했고, 12월5일 요코하마에 도착했다.

이상의 여정을 고려하면 1939년 2월17일 이후 <대금강산보> 필름의 소재는 4시기로 나눌 수 있다. (1) 9월7일까지는 상젤리제의 스튜디오에 보관되었을 것이다. (2) 파리를 출발해 보르도와 마르세유를 거쳐 10월25일 뉴욕에 도착할 때까지는 다른 짐과 함께 기차나 배의 화물칸에 적재되었을 것이다. (3) 미국과 남미 순회공연 시기에도 최승희는 이를 소지했을 것이다. (4) 일본에 돌아온 이후에는 에이후쿠초의 자택에 보관되었을 것이다.

순회공연 전 기간 동안 최승희가 필름을 분실하지 않았다면, <대금강산보>는 에이후쿠초의 자택에 보관되었다가 1944년 최승희가 도쿄를 떠나 베이징에 정착할 때 소지했을 것이다. 혹시 수하물 제한 등의 이유로 자택에 남겨두었다면 도쿄 대공습으로 저택이 파괴되었을 때 사라졌을 것이다. 약 2년의 베이징 체재 기간에도 <대금강산보>가 중국에서 상영되었다는 기록이 없는 것을 보면 이 필름은 도쿄에서 파괴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는 하다.

 

최승희는 1939년 9월18일 마르세유에서 피난선 하코네마루를 타고 유럽을 떠났다.


그러나 이 필름이 다른 곳에서 분실되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파리를 떠날 때 스튜디오에 남겨두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소중한 필름이었으므로 일부러 남겨두었을 리는 없지만 실수로 분실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래서 필자는 유럽 취재 동안에 최승희의 대행사였던 <발말레트>와 시사회를 주최했던 <프랑코 야폰 위원회>를 조사했다. <프랑코 야폰 위원회>는 없어졌고 관련 자료는 패전과 함께 일본으로 이관되었다고 했다. <발말레트>는 독자적인 박물관을 운영하고 있지만 목록상으로는 최승희와 관련된 어떤 자료도 소장하고 있지 않았다.

최승희가 파리를 떠나 보르도를 거쳐 마르세유로 이동하는 동안에 분실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피난민들이 한꺼번에 이동하던 시기였으므로 분실도 잦았고 분실물을 되찾기란 불가능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때 분실되었다면 <대금강산보>의 소재를 조사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미국과 남미 순회공연 기간에 필름을 분실했을 가능성은 낮다. 최승희가 비교적 안정적인 환경에서 공연을 이어갔기 때문이다. 다만 1940년 10월 최승희가 칠레에서 스파이 혐의를 받고 황급히 보고타를 떠났을 때, <대금강산보>의 필름을 분실했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는 없다. 

이상을 종합해 볼 때, <대금강산보>의 필름은 도쿄의 에이후쿠초 저택에서 소실되었을 가능성이 가장 크고, 혹은 남미 순회공연 시기에 칠레에서 분실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밖에 최승희가 이 필름을 중국으로까지 가져갔다면 그의 중국 체류시절을 조사해 볼 필요도 있다. 그러나 80여년이 지난 지금, <대금강산보>의 필름 소재를 찾는 일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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