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이무용단의 부산공연에서 10번째(2부의 4번째)로 상연된 <고뇌하는 그림자(惱ましき影)>는 이날 발표된 12개 무용작품 중에서 가장 덜 알려진 작품이었다. 번외작품으로 부가된 <일본무용>의 실재를 짐작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면, 그 바로 다음이 바로 이 <고뇌하는 그림자>였다. 적어도 한국에 알려진 문헌에는 이 작품을 서술하거나 평론한 것은 거의 없었다.
1927년 7월에 출판된 <석정막 팜플렛 1집>의 이시이 바쿠 작품 목록에는 <고뇌하는 그림자>가 없고, <쓸쓸한 그림자(淋しき影)라는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야마다 코사쿠의 악곡을 배경음악으로 사용해 1921년 도쿄에서 안무된 작품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1927년 7월3일, 도쿄 아사히강당 공연에서도 <고뇌하는 그림자>는 발표되지 않았고, 1928년 5월18일의 춘계공연과 10월일의 추계공연, 그리고 10월25-26일의 경성 공연에서도 <고뇌하는 그림자>와 <쓸쓸한 그림자>는 발표 작품에 포함되지 않았다. 1930년 7월에 출판된 <석정막 팜플렛 4집>에도 <쓸쓸한 그림자>와 <고뇌하는 그림자>가 빠져있었다. 즉 이 두 작품은 1927년 7월3일 이후에는 이시이 바쿠의 작품 목록에 수록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상으로 미루어 보아, 1921년에 창작되어 1926년까지 공연되었던 <고뇌하는 그림자>는 약간의 수정을 거쳐 1927년부터는 <쓸쓸한 그림자>로 개칭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1927년의 문헌에 처음 등장하는 <쓸쓸한 그림자>의 창작연도를 1921년으로 기록했기 때문이다. 이는 <고뇌하는 그림자>가 창작된 연도이기도 하다.
이렇게 개칭된 <쓸쓸한 그림자>나마 1927년 7월부터는 상연되지 않았는데, 아마도 이 작품이 안무자 이시이 바쿠의 성에 차지 않았거나, 관객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지 못한 작품으로 판단되었거나, 1927년경에는 이미 발표할 수 있는 레퍼토리가 상당히 축적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이 세 가지 이유가 모두 중첩되었기 때문에 <고뇌하는 그림자>와 <쓸쓸한 그림자>가 모두 이시이무용단의 레퍼토리에서 누락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시이 바쿠가 <고뇌하는 그림자>를 안무할 때 사용했던 배경음악은 어떤 악곡이었을까? 이시이 바쿠의 작품 목록에는 <고뇌하는 그림자>와 <쓸쓸한 그림자>가 모두 야마다 코사쿠의 음악을 사용한 작품이라고 서술되어 있지만, 야마다 코사쿠의 작품 목록을 보면 ‘그림자’라는 말이 들어있는 제목의 작품은 없었다.
<고뇌하는 그림자>의 음악에 대한 유일한 힌트는 1926년 3월20일의 <경성일보>가 제공한다. 이 기사에서는 <고뇌하는 그림자>를 설명하면서 “신앙과 유혹(信仰と誘惑), 계율의 빛(戒律の光り), 처녀의 달빛 고뇌(處女の月光の惱み), 고결한 마음에서 벌어지는 영과 육의 싸움(心高きものゝ靈と肉の爭ひ)”을 묘사한 작품이라고 했다. ‘신앙’이나 ‘유혹’, ‘계율’이라든가 ‘영과 육의 싸움’ 등의 표현은 종교적 용어들임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야마다 코사쿠의 작품 중에 종교적 소재를 작품화한 것으로 교향곡 <막달라마리아(マグダラのマリア, 1916)>가 있다. 이 작품은 야마다 코사쿠 본인에 의해 무도교향곡(舞踏交響曲)이라고 서술되었으므로 무용작품과도 관련될 가능성이 충분했다.
야마다 코사쿠의 무도교향곡 <막달라 마리아>는 벨기에 극작가 모리스 마테를링크(Maurice Maeterlinck, 1862-1949)의 희곡 <막달라 마리아(Marie-Magdeleine, 1910)>의 제2막을 교향악으로 작곡한 것이다. 1911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마테를링크의 <막달라 마리아> 2막은 “창녀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의 십자가 처형 전날 밤 로마군 장군 베루스(Lucius Verus)에게 예수 처형 중지를 요청하지만, 질투심에 휩싸인 베루스는 이를 거절한다”는 내용이다.
이 같은 내용을 잘 알고 있던 이시이 바쿠는 야마다 코사쿠의 <막달라 마리아>를 사용하여, 예수 처형 전날 밤, 예수의 가르침과 베루스의 질투 사이에서 ‘고뇌’하던 막달라 마리아, 결국 예수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했던 그의 ‘쓸쓸한’ 심경을 그림자로 형상화하여 무용작품으로 형상화했던 것으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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