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외교는 그 목적이 인권 일반이나 특히 소수자의 인권을 보호하려는 것일 때 효과가 가장 크다. 시민사회의 관심이 집중되고 결속이 강화되며 주장이 확산되기 쉽기 때문이고, 이에 대한 지방정부와 중앙정부의 지지와 지원을 얻어내기가 쉽기 때문이다. 조선인 추도비의 경우 일제강점 식민지시기에 열악한 노동조건과 낮은 임금으로 중노동에 시달리다가 사고사를 당한 5인의 넋을 위로한다는 것은 일본인과 재일조선인 사회에서 큰 반향을 얻을 수 있었다. 또한 이같은 추도비를 세운다는 것은 다카라즈카 정부의 지지를 받은 것도 일본 근대화 과정에서 희생된 외국인 노동자의 추도비를 세우는 것이 소수자 인권보호에 부합되기 때문이다.
공공외교 사안을 추진하는 시민사회가 다수일 때, 혹은 소수이더라도 단결된 모습을 보일 때 효과를 발휘하기 쉽다. 조선인 추도비가 세워진 것은 다카라즈카의 일본인 시민활동가들뿐 아니라 재일조선인, 특히 한때 반목하고 대립했던 민단계와 총련계 조선인들이 같은 목소리로 내고 추도비 건립을 위해 협력했던 것이 좋은 효과를 낳은 원동력이 되었다. 강릉에서 감사패를 증정하려는 청원이 채택된 것도 마찬가지이다. 각계각층의 강릉 시민들이 청원을 내고, 여기에 서울과 일본의 활동가들이 동조하며 감사패 증정의 필요성과 유용성을 강조했을 때 강릉시가 이에 부응하는 결정을 내리기가 수월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지방정부가 민간부문의 공공외교를 지지할 때 외교의 효과는 매우 커질 수 있다. 만일 다카라즈카 시정부가 추도비 건립에 반대했더라도 시민들은 사유지에라도 이를 건립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카라즈카 시정부가 추도비를 시립공원 내에 설치하도록 허가하고, 당시의 시장이 자신의 이름과 직함을 추도비에 새기가 함으로써 이 추도비의 공공의 성격은 한층 강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강릉 시정부가 추도비 건립자들에 대한 감사패 증정을 거절했더라도 청원자들은 시민단체의 이름으로라도 감사패는 전달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강릉시가 김한근 시장 명의의 감사패를 증정하기로 결정하고 이를 집행하자, 시민들이 추진한 감사패는 그 의미가 매우 커졌다. 다카라즈카 현지에서는 일본 시민운동가들의 활동에 한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감사의 표현을 한 것은 처음있는 일이라며 큰 의미를 부여했고, 감사패를 수여받은 당사자들도 이를 감격적으로 여겼던 것이다.
한편 공공외교는 중앙정부의 정책에 위배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중앙정부는 공공외교 활동 목적이나 방식이 중앙정부의 외교정책에 배치될 경우, 지방정부나 시민들의 외교활동을 제한하거나 저지할 권한이 있기 때문이다. 비티에스(BTS)의 유엔외교는 소수자 인권보호라는 한국정부의 정책과 일치했기 때문에 정부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고, 결과적으로 그룹과 정부는 물론 한국의 국가브랜드가 크게 높아지는 결과를 낳았다. 반면 안용복의 독도외교는 영토수호하는 큰 목표를 이루고도 당사자는 국가의 처벌을 받아야 했다. 조선정부의 정책(=공도정책)에 배치되는 외교활동을 했을 뿐 아니라, 정부의 허가 없이 국경을 넘었고, 또 공무원을 사칭한 혐의를 받았기 때문이다. 조선의 법률에 따르면 이같은 죄목이 적용되었을 경우 사형선고를 면하지 못할 상황이었으나, 영토를 수호했다는 외교효과를 고려해 유배를 가는 선으로 형량이 감경되었던 것이다.
다카라즈카의 조선인 추도비 건립과 강릉시의 감사패 증정은 둘 다 중앙정부의 외교정책에 위배되지 않았으므로 중앙정부의 추인 아래 지방정부가 이를 지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만일 추도비의 희생자들이 강제동원 노동자들이었다면 문제는 전혀 달랐을 것이다. 당시 일본 정부(=내각)는 “강제동원” 자체를 부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카라즈카 추도비의 희생자들은 1914-1929년까지, 강제동원이 시작되기 이전에 노동이민으로 일본에 건너갔다가 사고사를 당한 분들이기 때문에, 이들을 추도하는 것은 중앙정부의 외교정책에 위배되지 않았던 것이다.
공식외교와는 달리 공공외교는 부문별로 참여자가 많기 때문에 긴밀한 의사소통이 대단히 중요하다. 다카라즈카의 경우 시정부는 물론 다수의 시민단체들이 참여해 추도비를 건립했다. 다카라즈카의 <교류협회>와 오사카의 <목련회>, 그리고 기존의 이 두 단체를 한데 모으고 효고현 전체에서 회원을 더 영입해 결성한 <추도비건립회>의 회원만도 50명이 넘었고, 이들을 지지하는 일본인 시민활동가와 재일동포 활동가들은 그 수를 수백명을 헤아렸다. 따라서 추도비 건립 결정과 추진 과정을 회원들에게 알리고, 필요한 정보를 시정부에 제공하면서 동시에 시정부가 제공하는 지침을 전달받기 위해서는 긴밀한 의소소통이 필수적이었던 것이다. 2015년에 시작한 추도비 건립이 2020년에야 마무리되기까지 햇수로 5년이나 걸린 것도, 신속하게 건립되는 추도비보다는 많은 사람이 이해하고 참여해 건립되는 추도비가 되도록 <추도비건립회>가 애를 썼기 때문이다. 목표한대로 추도비 건립은 별다른 잡음이나 방해없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될 수 있었다.
반면에 강릉시의 감사패 전달은 2021년 11월부터 2022년 3월26일까지 비교적 신속하게 이루어졌는데 이것도 역시 원활한 의사소통 덕분이었다고 볼 수 있다. 10명의 청원인들이 청원을 결정한 것도 카카오톡 단톡방을 통해 신속하게 이루어졌고, 이를 강릉시의회를 경유해 강릉시청에 접수시키는 일도 말이 나온지 수일 만에 모두 이루어졌다. 이후 강릉시청의 실무자들과의 협의도 최초의 만남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의논이 카톡과 이메일로 이뤄졌기 때문에 의사소통은 대단히 빠르고 원활했다. 또 강릉시청의 결정이 일본에 전달되는 것도 거의 실시간이었고, 도쿄의 강원도대표부와 고베 총영사관이 업무를 배정하는 결정도 신속하게 이뤄졌기 때문에 모든 일은 매우 빠른 속도로 진행될 수 있었다. 따라서 명확하고 신속한 의사소통은 공공외교의 핵심적인 요인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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