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호 선생이 관람한 최승희 공연이 (1) 1941년 4월2-6일의 경성 부민관 공연이거나, (2) 1942년 2월16-20일의 경성 부민관 공연, 혹은 (3) 1942년 2월말-5월하순 사이의 지방 순회공연이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었다. 정병호 선생의 중학시절이 1940년 4월부터 1945년 3월까지였을 것으로 추정되었기 때문이다.
이중 어떤 것이었는지 범위를 더 좁히려면 정병호 선생이 어디에서 중학교를 다녔는지 알면 된다. 박경중 선생님은 서울에서 중학교를 다니셨다고 하셨고, 김준혁 선생은 광주에서 다니셨다고 했다. 동시에 두 곳에서 중학교를 다닐 수는 없으므로 서울과 광주, 둘 중의 한 곳일 것이다. 만일 서울에서 중학교 생활을 했다면 (1)과 (2)의 부민관 공연일 가능성이 높고, 광주에서 중학교를 다녔다면 (3)의 지방 순회공연 중의 광주공연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가능성이 높다”고 한 것은 서울에서 중학교를 다녔어도 광주공연을 관람했을 가능성도 있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일 것이기 때문이다. 일부 신문기사들은 정병호 선생이 관람한 공연이 ‘광주 공연’이라고 못 박기도 했는데, 정병호 선생의 평전 <춤추는 최승희(1995)>의 머리말에 기록한 자신의 증언에는 지역이 특정되지 않았고, 박경중 선생님과 김준혁 선생의 증언이 엇갈렸기 때문에 이를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정병호 선생이 재학했던 중학교가 어디였는지가 확인되기 전까지는 모든 가능성을 다 살펴볼 수밖에 없는데, 그 방법 중의 하나가 최승희 공연의 레퍼토리를 살피는 일이다. 정병호 선생은 최승희 공연에서 <에헤야 노아라(1934)>와 <초립동(1937)>과 <보살춤(1937)>을 관람했고, 특히 <보살춤>의 의상이 선정적이었다고 기억했다. 따라서 위의 (1), (2), (3)의 공연에서 이 세 작품이 한꺼번에 발표되었는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1941년 4월2-6일의 경성 부민관 공연 레퍼토리는 1941년 4월1일자 <조선신문(4면)>에서 기사화되었다. “호화로운 프로그램의 최승희 공연”이라는 제목의 기사 전문은 다음과 같았다.
“(제목) 호화로운 프로그램의 최승희의 공연, (부제) 2일부터 부민관에서, (본문) 2일부터 경성부민관에 출연하는 세기의 무희 최승희의 귀국 제1회 무용공연은 만도(滿都)의 뜨거운(灼熱的) 전인기아래 그 개회를 기다리고 있는데, 그 호화로운 프로그램은 다음과 같이 결정되었다.
“제1부: (1) 두 개의 속무(二つの俗舞, 음악은 속곡(俗曲)), (2) 옥적조(玉笛調, 고곡(古曲)), (3) 화랑무(花郞の舞, 속곡), (4) 신노심불로(身老心不老, 고곡), (5) 보현보살(普賢菩薩, 고곡), (6) 두 개의 전통적 리듬(二つの傳統的リズム, 고곡); 제2부, (7) 긴소매의 형식(長袖の形式, 고곡), (8) 소년 신랑(少年花婿, 속곡), (9) 관음보살(觀音菩薩, 고곡), (10) 가면무(假面舞, 속곡), (11) 동양적 선율(東洋的旋律, 속곡), (12) 즉흥무(卽興舞, 고곡). (사진은 그의 무대모습).”
이 기사에 보이듯이 1941년 4월 경성 부민관 공연의 레퍼토리는 1,2부에 6작품씩 모두 12작품으로 구성되었다. 괄호 안의 속곡(俗曲)이나 고곡(古曲)이라고 표시한 것은 반주음악이다. ‘속곡’이란 민간에서 불리던 ‘민요,’ ‘고곡’이란 조선의 고전음악인 ‘아악’을 가리킨다.
민요와 아악을 반주음악으로 사용하더라도 원곡 그대로 사용된 적은 거의 없다. 최승희 선생은 자신의 각 작품에 맞추어 원곡을 편곡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리듬과 박자, 멜로디와 가사는 원곡과 같더라도 그 진행은 다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축음기를 이용한 녹음 반주일 경우에는 가사가 있는 경우도 있었겠으나 대부분은 가사가 없는 기악곡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레퍼토리에 따르면 정병호 선생이 관람했다는 <에헤야 노아라>, <초립동>, <보살춤>이 같은 제목으로 발표된 것이 없었다. <보현보살>과 <가무보살>이 <보살춤>에 가까운 제목인데,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둘 중의 어떤 것이 정병호 선생이 관람한 작품이었을까? 더구나 <에헤야 노아라>와 <초립동>은 그 비슷한 이름의 작품도 찾을 수 없다.
어찌된 일일까? 1941년 4월의 부민관 공연은 정병호 선생이 관람했던 최승희 공연이 아니었던 것일까? 암튼, 조사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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