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중 선생 인터뷰를 계기로, 정병호 선생이 관람한 최승희 공연이 어떤 공연이었는지 추정하면서, 1940년대 초의 최승희 무용작품의 성격을 살피기에 이르렀다.
1941년 초에 열렸던 <조광>과 <춘추>의 좌담회에서 최승희는 “조선음악으로 반주되는 독무 중심의 조선무용”을 공연해 나갈 것이라면서, 그의 조선무용은 (1) 전통작품과 (2) 조선작품, 그리고 (3) 동양작품으로 구성될 것이며, 향후 동양작품의 비중을 높여가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와 유사한 작품 분류는 그보다 5년 전에 출판된 <나의 자서전(私の自敍傳, 1936)>에서도 제시된 바 있었다. 자서전 15장의 “내 무용의 방향에 대하여(私の舞踊の方向に就いて)”에서 최승희는 자신의 무용작품을 세 가지로 분류했다.
“사실 나는 나의 조선무용을 근대무용의 기초 위에서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에헤야 노아라>와 <승무> 등의 작품은 비교적 순수한 조선적 기법만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검무>와 <조선풍의 듀엣> 등의 작품은 어느 정도까지는 근대 무용의 기법을 포함하고 있고, <세 개의 코리안 멜로디>에 이르면 서양식 무용 기법이 주를 이루고 단지 거기에 조선적인 색깔과 향기를 입히려고 시도한 것입니다.”
이때(1935년경) 최승희 선생은 조선무용과 서양무용을 결합해 작품화하는 문제를 고민 중이었다. 그는 도쿄 유학기간(1926-1929년)에 전적으로 서양의 근대무용을 익혔고, 경성 활동시기(1930-1933년)에는 서양기법 위에서 조선의 현실을 주제로 한 작품을 창작했지만, 두 번째 도일 후 첫 조선무용 작품 <에헤야 노아라(1933)>이 폭발적 인기를 끌자 <검무(1934)>와 <승무(1934)>를 잇달아 발표했다. 바로 이 즈음 최승희 선생은 서양 근대무용 기법과 조선의 전통무용 기법 사이에서 충돌을 느꼈고, 이를 어떻게든 정리할 필요를 느꼈던 것이다.
그래서 태어난 분류법이 바로 <나의 자서전>에 기록된 무용 기법상의 분류이다. 각 부류에 상응하는 용어를 만들지 않고 그냥 “비교적 순수한 조선적 기법”이라든가, “어느 정도 근대 무용의 기법”을 활용한 작품이라든가, “서양식 무용 기법이 주를 이룬” 작품이라는 식으로 느슨하게 서술한 것을 보면, 이때만 해도 정교한 분류를 시도한 것 같지는 않다.
그런데 이러한 서술에서나마 최승희 선생이 예로 든 작품들은 주제와 소재와 정조에 있어서 모두 조선무용이었던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때쯤 최승희 선생의 무용은 전적으로 조선무용으로 방향이 결정되었다는 뜻이겠다. 그리고 이시기에 최승희 선생은 이미 조선무용을 넘어 동양무용의 개념화를 시도했다. <나의 자서전>의 같은 장에서 최승희 선생은 이렇게 썼다.
“적당한 말은 아니겠으나, ‘무용의 오리엔탈리즘’을 발견하여, 그것을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해 보고 싶다고 항상 생각해 왔습니다. 이것이 지금 내 무용의 가장 중심적인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 내 자신의 서양 무용에서도 나는 가능한 한 동양적인 색깔과 향기를 갖도록 하고 있습니다. 또 쇼팽과 드뷔시의 곡에 의한 춤이라도 가능한 범위 안에서 동양적 기법을 도입해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최승희 선생이 조선무용에 머무르지 않고 ‘무용의 오리엔탈리즘을 발견’하고, ‘동양적인 색깔과 향기를’ 추구할 뿐만 아니라 ‘동양적 기법을 도입’해보려고 노력했던 까닭은 무엇일까?
첫째는 조선무용의 소재와 기법이 제한적이라고 여겼기 때문인 것 같다. 같은 글에서 그는 “나의 조선무용을 보다 풍부하고 복잡한 것으로 만들어 나가고 싶”고 “그것을 국제적인 수준까지 높”이려고 한다고 썼다. 뒤집어 말하면, 당시의 조선무용은 풍부하거나 복잡하지도 못하고, 국제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둘째는, 서양무용이 발레라는 이름으로 통일되었듯이, 그에 상응하는 동양무용이 가능할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동양 각국의 무용이 가진 특수성은 일시적이거나 우연적인 것이며 모든 동양무용을 관통하는 공통요소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내 “이 방향이 생각처럼 단순하지는 않겠”고 “훨씬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일 것이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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