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희 선생은 세계 순회공연을 마치고 돌아온 직후 미야코신문(都新聞)과 가진 인터뷰에서 “조선악기를 사용하는 조선음악을 반주로 독무 중심의 조선무용을 계속 공연하겠다”는 포부와 계획을 밝힌 바 있다.
그러나 그 계획은 곧 좌절된 것으로 보인다. 그해(1941년) 11월28일부터 3일간 열린 귀조(歸朝) 2번째 도쿄 공연이었던 다카라즈카(寶塚)극장 공연 레퍼토리의 성격이 최승희 선생의 의도와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한동안 최승희 선생은 자신의 결심을 관철시켰다. 도쿄 가부키자 공연(1941년 2월21-25일)에 이어 열린 오사카공연(3월1-3일, 아사히칸)과 교토공연(3월5-6일)의 발표 작품들이 모두 조선무용 일색이었고, 이는 조선 경성공연(4월2-6일, 부민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941년 2월28일자 <아사히신문(오사카판, 2면)>에 따르면 오사카공연(3월1-3일)과 교토공연(5-6일) 레퍼토리는 도쿄 가부키자에서 발표된 13개 작품이 순서까지 똑같이 반복되었고, 1941년 4월1일자 <조선신문(4면)>에 따르면 4월2-6일의 경성 부민관 공연에서도 도쿄공연 레퍼토리서 <검무>만 제외한 나머지 12개 작품이 그대로 상연되었다.
최승희 선생의 결심과 계획은 1941년 3월30일 경성의 문예 월간지 <조광>이 “최승희의 무용과 포부를 듣는 간담회”라는 제목으로 주최한 좌담회에서 다시 한 번 천명되었다. 함화진(咸和鎭)과 송석하(宋錫夏), 이갑섭(李甲燮) 등이 질문자로 참석한 가운데 열린 이 좌담회의 내용은 <조광> 1941년 5월호에 실렸는데, “서양 가셔서 민속무용과 향토무용을 주로 하셨겠지요?”하고 묻는 함화진의 질문에 최승희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프로그람을 세 종목으로 나누었어요. ... 첫째는 현재에도 남아 있고 제대로 해오던 향토무용 민간무용 등을 다시 무대화시킨 것이고요, 둘째는 테-마는 조선 것인데 현재에는 무용화되지 않은 것을 제 상상력으로 이렇겠다 하고 만든 것, 그리고 또 하나는 전동양적인 것, 즉 내지, 지나, 조선, 인도에 있는 것에서 얻은 인상이나 감상을 가지고 만든 것, 대개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전동양적인 무용, 향토무용, 궁정무용, 민속무용 그런 것을 기초로 하고 창작한 것, 또 한 가지는 예를 들면 초립동이니 천하대장군이니 하는 것이면 초립동이는 초립동이의 까부는 느낌이라든지 천하대장군의 <감지(感じ)>를 이메지네이숀으로 현표하는 것이지요. 이런 것으로 이번에 서양에서 했는데 그 사람들은 처음 보는데도 불구하고 잘 알아요. 인도춤보다 조선춤을 그 사람들에게 알기가 쉬운 모양이에요. 조선 춤이라는 것이 대개가 흥에 겨워서- 다시 말하면 감정적이 아니예요? 희노애락의 감은 코스모폴리탄한 것이니까요. 국제적으로 공통되죠?”
이 대답에서 보듯이 최승희의 유럽과 미주공연에서는 대부분의 조선무용과 일부 동양적 무용작품이 포함되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는 또 유럽과 미주에서 호평을 받았던 자신의 작품이 <보살춤>과 <전통적 리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해설하기도 했다.
“<보살춤>이라든지 <전통적 리듬>이라든지 퍽 평판이 좋았어요. 보살춤이라는 것은 하체는 그대로 두고 주로 손과 상체를 놀리는 것인데요, 상체만 가지고 하는 것에는 서양 사람은 동양 사람보다 훨씬 못합니다. 그래서 보살춤이 문제도 됐고 평판도 좋았어요.”
또 “춤에는 민족마다 버릇이 있”다면서 “민족마다 ... 무풍(舞風)이라는 것이 있”지 않느냐는 송석하의 지적에 대해서도 최승희는 이렇게 대답했다.
“민속무용이라는 것은 그 나라 사람이 아니면 자연스럽지가 않아요. 서반아 무용은 세계에 유명한 것이지만 아무가 해도 서반아 무용의 미묘하고 델리케-트한 곳은 표현하지 못한대요. 그렇지만 서반아 여자가 하면 설사 춤은 서툴러도 잘 표현한다니까요. 그런 점으로 봐서 동양사람이 서양무용을 한다는 것은 어려운 문제가 아닌가 해요. 지금까지 저도 서양 무용을 해왔는데요, 인제부터는 동양무용에 전력을 할 생각입니다.”
그는 또 향후의 계획을 묻는 사회자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무용한 지 십오년째 됩니다마는 외국 가서 제 밟아나갈 사명을 깨달았어요. 이후의 이상으로는 조선무용을 토대로 하고 힘이 자라는 대로 전동양적인 것도 해보려고 합니다. 불교예술도 좀 더 연구하고 인도무용, 일본 향토무용, 유구(流球)무용 같은 것도 손을 대 보겠습니다.”
피아노를 포기하고 조선무용을 조선악기의 조선음악으로 반주하겠다는 생각은 이 <조광> 좌담회에서도 다시 한 번 피력되었다. 도쿄 가부키자 공연의 경험과 후기를 되새기면서 최승희는 이렇게 말했다.
“가무기좌(歌舞伎座)에서 조선악으로 반주를 했더니 어떤 사람은 귀에 익지 않아서 서투르다고 양악으로 해달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또 조선악의 몇 가지를 가지고 반주를 하는 것이 씸포니 오케스트라로 한 것보다도 몇 배 낫다고, 단순한 속에 미묘한 하모니는 여하한 오케스트라의 비(比)할 바가 아니라고 극찬을 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음악이 춤을 따라간다고 해요.”
이와 관련하여 “반주자에 적당한 사람만 있으면 전속으로 두실 의향이 계”시느냐는 송석하의 질문에 대해서도 최승희는 이렇게 대답했다.
“제가 무용생활을 할 때까지 손을 맞잡고 할 만한 사람이 있으면 하겠어요. 조선음악을 세계적으로 진출시키고 싶다는 야심도 있으니까요. (웃는다). 조선 음악을 위해서 일신을 바치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언제까지든지 함께 연구하겠습니다.”
이어서 이갑섭이 “최여사의 예술을 맡길 만한 제자를 발견하셨습니까? 그런 사람이 있어요? 제자도 양성하고 계십니까?”라고 물었는데, 이에 대해 최승희 선생은 부정적으로 답변했다.
“제자 양성보다 제가 연구할 것이 택산(澤山) 같아서요. 무어 그럴 여유가 있어야지요. ... 전에는 (문하생을) 사오십 명 두어 봤었죠. 후계자를 양성하겠다는 의미로 가르쳐봤는데... 여러 가지 지장이 많아요. 그러나 유망한 아이만 있으면 이후라도 후계자를 양성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제 딸이나 조카딸 속에서도 뽑아가지고 가르쳐 보려고 합니다. 저이들도 좋아하니까...”
딸과 조카딸을 거론하는 최승희에게 “세습을 생각”하는 것 아니냐는 농담의 질문을 던진 함화진에게 최승희는 제자 양성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남의 애는 열심히 가르쳐도 중간에 튕겨지면 대성되기 전에 아무것도 안되니까요. 그러니까 제 딸이나 조카딸들에게 가르치려고까지 하는 생각이 나지요. 물론 끝까지 해보겠다는 희망자가 있다면 얼마든지 양성해 보고자 합니다. ... 제 자신이 미숙하나마 십오년 이상 걸어온 무용가로서의 노력의 결과를 후배에게 가르쳐주려고 노력은 합니다만은 어디 여의하게 아니되느면요. ... 저는 사적으로 무용생활을 비결로써 미공개시킨다는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그게 친척이거나 타인이거나 대성하는 희망이 있는 후배에게 전하려 합니다. 그러나 무용가로서 대성하기 위한 장시일의 노력을 끝끝내 갖는 사람이 드물어 걱정입니다.”
요컨대 “희망있는 후배”가 나타나기만 하면 얼마든지 자신의 경험을 전수하겠다면서도 그런 자질과 끈기를 가진 지원자를 발견하기 어렵기 때문에 제자 양성에 한계를 느낀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이후에도 최승희는 일본식으로 자신의 이름을 물려주는 수제자들을 양성하지 않았는데, 그의 딸 안성희가 결국 그의 뒤를 이었다.
최승희가 제자 양성에 비관적인 생각을 가졌던 것은 경성시절과 도쿄시절을 통해 그의 수제자로 성장했던 김민자(金敏子)가 해외 순회공연 동안에 자신의 허락 없이 조택원의 파트너가 되어 무대에 오르는 ‘외도’를 했었기 때문이다. 이에 분노한 최승희는 곧 김민자와 결별했고, 김민자는 독립했지만 이후 그다지 뚜렷한 성취를 일구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후 최승희는 조선무용을 독무 중심으로 진행하되 제자 양성에는 적극성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요컨대 최승희 선생은 세계 순회공연 이후 (1) 조선음악으로 반주하는 조선무용을 (2) 제자들의 도움없이 독무 중심으로 창작, 공연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는데, 이는 1941년 2월에 가졌던 도쿄의 미야코신문(都新聞)과의 인터뷰에서도 밝혔고, 그해 3월말 조선순회공연을 위해 경성을 방문했을 때에도 문예지 <조광>과 가졌던 좌담회에서도 재천명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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