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동 선생님을 인터뷰하던 중 생가가 북성터에 있었다는 답변 때문에 나주성곽과 성문에 대해 후속 조사를 하던 중, 김경손 장군이 전라도 지휘사 시절에 나주성을 근거로 이연년(李延年) 형제의 반란을 진압했다는 기록을 읽었다.

 

이는 필자가 전혀 몰랐던 사실(史實)이었으므로 호기심에 <고려사(103)> 열전16권에 실린 김경손의 기록을 찾아 읽었다. 특히 김경손 장군이 이연년 형제의 반란을 토벌하기 위해 나주 성문을 나서는 장면을 서술하면서 사용된 현문(懸門)’이라는 표현에 관심이 집중됐다.

 

김경손의 원래 이름은 김운래(雲來), 평장사 김태서(金台瑞)의 아들이다. 문음(門蔭, 음서제도)으로 벼슬하다가 고종18(1231) 정주(靜州) 분도장군으로 임명됐다. 몽골군이 압록강을 건너 철주(鐵州)를 함락하고 정주까지 침입하자 김경손은 12명의 병력으로 몽골병을 물리쳤다.

 

 

재차 대군이 몰려오자 귀주(龜州)로 퇴각, 귀주성 남문을 수비하던 중 적장을 활로 쓰러뜨리고 적군을 물리쳤다. 이어 귀주성 수비 책임자로 20여 일간의 전투 끝에 몽골군을 격퇴했다. 이 공으로 대장군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로 승진, 고종24(1237) 전라도 지휘사로 임명됐다.

 

나주에 부임한 김경손은 백제부흥을 목표로 원율(原栗=담양)에서 봉기한 이연년 형제의 난을 진압했다. 이연년 형제가 해양(海陽=광주)을 함락하고 나주성을 포위하자, 김경손은 별초(別抄=특공대) 30명을 선발, “너희 고을은 어향(御鄕=왕의 고향)이므로 적에게 항복해서는 안 된다고 독전하고, 금성산신에게 제사한 후 출정했다. 이 부분의 원문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성문을 열고 나가는데 현문(懸門)을 속히 내리지 않으므로 수문장을 불러 죽이려 하니 곧 현문(懸門)을 내렸다. 이때 이연년이 그의 부하들을 경계하여 지휘사는 귀주 싸움에서 성공한 대장이다. 인망이 높은 사람이니 내가 이 사람을 생포하여 도통(都統)으로 삼을 작정인즉 활을 쏘지 말라고 하고 ... 단병 접전으로 공격하라고 지시했다.

이연년은 자기의 용맹을 믿고 곧바로 앞으로 내달아 김경손의 말고삐를 잡아끌고 생포하려 했다. 김경손이 검을 뽑아 들고 싸움을 독려하니 별초들이 몸을 생각지 않고 싸워서 이연년을 죽이고 높아진 기세를 내몰아 적들을 패멸시켰다. 되었다. 그래서 그 지방이 다시 평정되었다.”

 

 

이 기록에서 당시의 나주성이 현문식 성문을 가진 석축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현문이란 바닥에서가 아니라 성체(成體=성벽)의 일정한 높이에서 만들어진 문이다. 출입을 위해서는 사다리 형식의 내리는() ()’을 사용하는 구조였다. 이는 사다리를 내리고 올려야 하는 출입의 불편을 감수하는 대신 적군의 침입으로부터 성문 수비를 강화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현문 구조는 5-6세기 신라시기부터 산성을 중심으로 널리 사용됐고, 남북조 시대를 통해 한반도에 광범위하게 분포했을 뿐 아니라, 그 형식을 발전시켜 고려시대에도 사용되었다.

 

이상한 점은 국립문화재연구원의 <문화유산 연구지식포털>이 김경손 장군 시기의 나주성이 토축(土築), 즉 흙으로 지은 토성(土城)이었다고 서술한 점이다. 이 자료는 나주성이 석축으로 재건된 것이 조선 태종4(1404) 10월이거나, 문종1(1451) 8월이었고, 그 완성은 김계희(金係熙)의 나주목사 재임(14578-145911월 사이) 시기였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은 현문이 설치된 성벽은 대부분 석축(石築)이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 13세기 김경손이 이연년 형제의 반란을 진압할 시기의 나주성은 석축성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조선 시대에 들어 나주성을 석축성으로 개축 또는 증축했던 것은 사실이겠지만, 그것이 신축이었다고 보기 어려운 대목이다.

 

13세기 김경손 장군 시기의 나주성이 석축성이었다는 필자의 주장은 아직 추정이지만, 15세기 중반에 나주목사 김계희가 증축한 나주성은 옹성을 부가한 홍예식 성문 구조였다. 이후 나주성은 임진왜란 직후를 비롯해 2차례 개축되면서 대한제국 시기에도 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20세기 초 일제에 의해 성벽과 성문이 대부분 철거된 후, 그 헐린 북문에 이학동 선생님의 생가가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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