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5119일 최승희 선생의 다카라즈카 대극장 공연은 여러모로 이례적인 행사였습니다.

 

우선 주변의 대도시 오사카(1025)와 고베(26), 교토(118)에서 모두 공연이 열렸는데도 소도시 다카라즈카에서 또 다시 공연을 열었습니다. 다카라즈카에서 오사카와 고베까지는 전차로 30분밖에 걸리지 않고, 교토까지도 1시간 이내이기 때문에 다카라즈카에서 별도의 공연을 연다는 것은 흥행의 측면에서 그리 상식적이지 않습니다.

 

 

둘째, 주요 신문의 다카라즈카 공연 예고기사도 이례적입니다. 오사카 공연(1025)의 홍보는 예술잡지 <회관예술> 10월호에 실린 대대적인 특집기사로 시작되었습니다. 당시의 잡지발행 관행으로 10월호라면 이미 9월 중순부터 편집되기 때문에 한 달 이상 전부터 공연이 예고되고 홍보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베 공연(1026)1011일자 <고베신문>무희 최승희가 온다는 기사가 홍보를 시작했고, 이후 두 주일 동안 주요 신문에 최승희 소개 기사와 광고문이 계속 실렸습니다. 교토 공연(118)의 홍보 광고는 일주일 전인 111일부터 <교토신문>에 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다카라즈카 공연(119)의 광고는 <오사카마이니치신문>이 하루 전인 118, <오사카아사히신문><고베신문><교토신문>은 공연 당일의 조간신문에 실었을 뿐입니다.

 

 

셋째, 간사이 공연의 동선이 이례적입니다. 최승희 선생은 오사카(25)에서 시작해서 고베(26), 오카야마(27), 구레(29), 히로시마(30)로 서진하다가, 다시 돌아와서 119일에 다카라즈카 공연을 가집니다. 그리고나서 다시 1113일부터 노가타(直方)를 시작으로 큐슈 순회공연을 단행했습니다.

 

다시 말해 다카라즈카 공연은 동선 상으로 간사이공연의 첫 공연, 혹은 오사카에 이은 두 번째나 고베에 이은 세 번째 공연이 되어야 하지만, 간사이의 마지막 공연으로 열렸습니다. 이는 다카라즈카 공연이 오사카 공연처럼 1달 전부터 준비된 것이 아니라 간사이 공연 도중에 급작스럽게 마련된 것이라는 인상을 줍니다.

 

넷째, 최승희 선생의 공연일지를 보면 다카라즈카 공연이 2회 오사카 공연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다카라즈카는 오사카와 가깝지만 고베와 함께 효고현에 속합니다. 다카라즈카를 오사카로 착각한 것은 최승희 선생측이 다카라즈카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끝으로, 앞글에서도 지적된 것처럼, 다카라즈카 대극장은 소녀가극단 전용 극장으로 사용되며, 외부의 예술가나 연예인들에게 대여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이 있었다는 점, 그러나 그 규칙을 깨고 최승희 선생의 공연을 위해 대관되었다는 점도 대단히 이례적인 일입니다.

 

이례성이 중첩되었다는 것은 의도가 개입했다는 뜻이겠습니다. , 다카라즈카 공연은 처음부터 계획된 공연이 아니라, 뒤늦게 끼워 넣어진 공연일 가능성이 높으며, 아마도 간사이 공연이 진행되는 도중에 기획되고, 제안되고, 수락되어, 진행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아마도 다카라즈카소녀가극단(=한큐전철)이 최승희 선생의 오사카와 고베의 공연이 성황을 이루는 것을 보고 다카라즈카 추가 공연을 제안했고, 최승희 선생 측은 이를 받아들여 이미 일정이 짜인 히로시마 공연과 큐슈 공연의 사이에 다카라즈카 공연을 끼워 넣었을 것입니다.

 

 

다카라즈카 대극장은 어째서 최승희의 공연을 유치하려고 했을까요? 막 떠오르는 스타 최승희의 흥행성과 상품성을 알아보았기 때문이겠지만, 최승희의 스승 이시이 바쿠의 권고나 중개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시이 바쿠는 1922년 세계 순회공연을 떠나기 직전에 다카라즈카 음악학교의 교사로 일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최승희는 왜 이 제안을 받아들였을까요? 2천석 극장의 공연과 12백명을 유치하는 촬영대회가 보장하는 수익은 당연히 좋은 조건이었을 것입니다. 그와 함께 다카라즈카에 공연을 보러와 줄 조선인 동포들이 많았다는 점도 수락의 이유 중의 하나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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