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이카이노의 제주인들이 공유한 기억 중에 <군대환>이 있습니다. <군대환>이란 제주-오사카를 정기 운항하던 여객화물선의 이름입니다. <군대환>에 대한 기억은 이카이노의 제주인들뿐 아니라 제주에 사는 제주인들에게도 오래 남았습니다. 1970년대까지도 제주도에서는 무언가 아주 큰 것을 가리킬 때 “군대환 같다”는 표현을 썼다고 하니까요.
일본인들은 이 배를 <키미가요마루(君が代丸)>라고 불렀지만 조선인들은 한국식 한자음으로 <군대환>이라고 했습니다. 오사카(大阪)를 ‘대판,’ 고베(神戶)를 ‘신호’라고 부르던 것과 같은 언어습관이었지요. 키미가요는 일본 국가의 제목이자 가사 첫 소절인데, 가사 내용은 이렇습니다. “당신의 통치는 천대와 8천대에 이르러 모래가 바위가 되어 이끼가 낄 때까지(君が代は/ 千代に八千代に/細石の巌となりて/ 苔の生すまで)” 여기서 당신이란 천황을 가리킵니다.
일본의 배이름이 ‘마루(丸)’로 끝나는 것은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전함을 건조하고 이를 니혼마루(日本丸)라고 부른 것이 효시였다는 말도 있고, 그보다 훨씬 전인 1187년 도쿄의 닌나지(仁和寺)에서 발견된 문서에도 <반도마루(坂東丸)>라는 배이름이 나옵니다. 배이름에 ‘마루’가 붙게 된 유래로 5-6가지 설이 더 있지만 어느 것이 정설인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문헌으로는 1900년에 제정된 훈령 “선박법취급절차(船舶法取扱手続)”의 항목 중에 “배 이름 끝에는 가급적 ‘마루’를 붙일 것”이라는 권고사항이 들어 있었는데, 그나마 그 조항은 2001년 훈령 개정 때 삭제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마루’가 붙지 않은 일본 배이름도 많지만, 일제강점기에는 모든 배가 ‘-마루’라고 불렸고, 키미가요마루, 즉 군대환도 예외는 아니었지요.
군대환이 아마가사키기선(尼崎汽船)회사에 의해 오사카-제주 정기 항로가 시작된 것은 1923년 3월이지만 실제 운항은 이미 1922년부터 부정기 노선으로 시작됐습니다. 어째서 이 시기에 항로가 개설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명이 있습니다.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으로 경작권을 잃어 살 방도가 막막해진 조선의 소작인들이 대규모로 발생했고, 때마침 1차대전 이후의 활황으로 ‘일본의 맨체스터’라고 불리던 오사카에는 대규모 노동력이 필요했었기 때문입니다.
어째서 제주-오사카 항로였을까요? 이에 대한 분명한 설명은 아직 없습니다. 다만 제주의 농사는 수익이 높지 않은 밭농사가 대부분이어서 토지조사사업의 타격이 컸고, 따라서 이농의 규모가 클 수밖에 없었다는 점, 그리고 제주인들이 근면하고 고분고분한 노동력이라는 소문이 있었다는 점 등이 꼽히는데, 그게 사실이었는지 확인하는 자료는 없습니다.
최초의 군대환은 1891년 네덜란드에서 건조된 여객화물선 스와르데크룬(Swaerdecroon)호를 개조한 배였습니다. 이 배는 네덜란드-인도네시아를 정기 운행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배가 보르네오 폰티아낙(Pontianak)항에 정박한 모습(연대 미상)과 1906년 자카르타 단쭝프리오크(Tandjong Priok)에서 수리됐다는 기록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스와르데크룬호는 무게가 669톤으로 그리 큰 배는 아니었고, 굴뚝이 한 개 설치된 것으로 보아 소규모 증기선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1922년 이 배를 매입한 아마가사키기선회사는 배 이름을 <키미가요마루>로 바꾸고 1922년 오사카-제주항로에 투입했습니다만, 1925년 9월 제주도의 서귀포와 표선 사이에서 좌초했습니다. 태풍을 만나 항해가 불가능해지자 선장은 배를 뭍으로 몰도록 명령했는데, 이는 인명피해를 줄이기 위한 조치였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아마가사키 기선회사는 좌초한 <군대환>을 대체할 선박으로 1925년 11월 러시아 군함 <만수르(Mandiur)>호를 매입했습니다. 러일전쟁 중에 전리품으로 빼앗은 이 배를 일본해군이 아마가사키기선회사에 불하했다는 말도 있지만, 일본군에 의해 타이완에서 무장해제되었던 만수르호는 러일전쟁 이후 러시아에 반납되었다가, 러시아 혁명 이후 소련 해군으로부터 건조된 지 40년을 맞은 만수르호는 노후선으로 아마가사키 기선회사가 매도되었던 것이 맞는 듯합니다.
이 러시아 군함 <만수르>호가 <제2군대환>으로 개조되어 오사카-제주 항로에 다시 투입되었는데, 제주인들의 기억에 남은 <군대환>은 바로 이 <제2군대환>이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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