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군대환> <2기미가요마루>1926년부터 제주-오사카 항로를 운항하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제주의 조선인들이 오사카를 통해 일본 전역으로 퍼져 들어가 1927년에는 재일 제주인의 숫자가 3만명을 넘어섰습니다.

 

1930년대에는 제주-오사카 항로 이용자 수가 연평균 32천여명에 달했고, 1934년에는 50,045명이 도항해 가장 많은 이동을 기록했고, 1939년의 재일 제주인은 459백명, 1945년 해방 당시에는 10만명을 넘어섰다고 합니다.

 

물론 이들이 모두 <군대환>을 이용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주-오사카를 운항하던 다른 배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제 조선총독부의 지원을 받는 친일회사 조선우선(朝鮮郵船)주식회사가 운항하던 <함경환(咸鏡丸, 749)><경성환(京城丸, 1,033)>이 있었습니다.

 

 

또 제주인들이 독자적으로 결성한 제주통항(濟州通航)조합의 <교룡환(蛟龍丸, 3,000)>과 동아통항(東亞通航)조합의 <복목환(伏木丸, 1332)>도 있었고, 기업동맹기선부가 시작했고 가고시마우선(鹿兒島郵船)주식회사가 인수받았던 <순길환(順吉丸, )>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1935년까지 다른 배들은 운영난을 이유로 항로에서 철수했고 일제 당국의 직간접의 지원을 받은 아마가사키기선(尼崎汽船)회사의 <군대환>만 남았습니다. 이후 1945년까지 10여년 동안 제주-오사카 운항은 <군대환>이 독점했던 것이지요.

 

1945년경 일본의 제주인이 10만명을 넘어섰을 때 이들이 제주-오사카를 왕복하던 배는 예외없이 <군대환>이었던 것입니다. 즉 연간 3만여명이 군대환에 승선했다는 통계가 있으므로, 1930년부터만 치더라도 1945년까지 15년간 연인원 45만명의 제주인들이 <군대환>을 이용했다는 뜻입니다. 당시 제주인구가 20만명이었으므로, 제주인 1인당 2회 이상 군대환을 탔던 셈입니다.

 

 

그러나 <군대환>의 승선경험은 그다지 쾌적할 리가 없었습니다. <군대환>의 승객 정원은 365명이었지만, 최대 685명까지 승선이 가능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정원의 거의 2배를 태운 것입니다. 이는 물론 영업 수익을 위한 것이었지만 1935년 이후 제주-오사카 항로에는 <군대환> 밖에 없었으므로 당국의 묵인하에 이같은 과적이 계속되었습니다.

 

승선 환경도 엉망이었습니다. <군대환>의 선실은 갑판 위의 상등선실과 갑판 아래의 하등선실로 나뉘어 있었는데, 하등선실은 다시 상층과 하층의 2단으로 나뉘어 있었고, 하등 선실의 천정이 매우 낮아 키 큰 사람이 서면 머리가 닿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 역시 여객 과적을 위한 방편이었을 겁니다. 이 과적 상황은 한 일본인에 의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습니다.

 

193481일 오사카 축항 잔교에서 제주도로 출발한 <군대환>에는 563명의 승객이 있었다. 이중에 상등객실 7명중 2명만이 일본인. ... 선실에는 누울 수 있는 공간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사람으로 만원이다. 그래서 통로도 좋고 갑판도 좋고 물건 위도 좋다, 또 뜨거운 햇빛 밑이라도 누워있는 모습이다. 아침에 브릿지에서 본 갑판은 너무도 처절한 풍경이다.”

 

 

<군대환>은 죽은 사람도 운반했습니다. 제주인들은 죽어서도 고향땅에 묻히기를 원했으므로, <군대환>의 상등객실 후미, , 배의 선미에 관을 안치할 곳을 2곳 마련됐다고 합니다. 시신이 배에 타면 상주는 만장을 걸어놓고서 운항하는 동안 내내 그곳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1927년경 <군대환>의 운임은 편도가 1250전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이카이노 여공의 일급이 1원이었다고 하니, 여공 월급의 절반에 해당하는 비싼 운임이었습니다. 요즘 일본의 최저시급이 1천엔 정도이므로 당시 흔하던 10시간 노동에 일급이 1만엔인 셈입니다. 따라서 <군대환>의 당시 운임은 오늘날 일본 돈으로 편도 125천엔, 한국 돈으로 125만원에 해당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시신의 운임은 일반 승객의 5배였다고 하니 6백만원이 넘는 돈입니다.

 

따라서 제주인들이 가졌던 <군대환>의 기억이 유쾌할 리 없습니다. 과적과 열악한 승선환경에다가 승선비용까지 매우 비쌌기 때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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