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이 해방된 직후, 일본 효고현 아마가사키(尼崎)에서도 <국어강습소>가 열렸습니다. 재일조선인 잡지 <이어(201511월호)>에 따르면 1946년 오쇼(大庄)와 하마다(浜田), 오시마(大島)와 무코(武庫), 쓰네마츠(常松)와 다치바나(立花), 소노다(園田)와 나가슈(長州) 등의 8개 지역에 3년제 초등학원이 조련에 의해 설립됐습니다. 통폐합 과정을 겪은 초등학원이 8개였다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그 배수 이상의 국어강습소가 있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1946424일 학생 350명과 교원 14명으로 개교한 오쇼초등학원은 오늘날의 아마가사키 조선초중급학교의 전신입니다. 19488개교가 다시 5개교로 개편되었는데, 오쇼초등학원을 본교로, 모리베와 소노타, 다치바나와 오시마의 초등학원은 분교로 통합되었습니다.

 

조련 오쇼초등학원은 일제강점 말기에 강제연행되어 온 조선인들이 숙소로 사용했던 후루카와 전기공업회사의 기숙사를 사들여 교사로 사용했습니다.

 

 

194910월 연합군최고사령부(GHQ: General Headquarters)와 일본정부는 <조선인학교 조치방침>을 발표하고 조선인의 의무교육은 일본의 공립학교에서 실시해야 하며, 무인가 조선인학교는 인정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효고현 내의 조선인학교 40개교에 폐쇄명령을 내렸습니다.

 

학교 폐쇄와 함께 조선인 학생들은 각 일본인 소학교에 강제 배정되었는데, 조선인들은 이에 격렬히 항의했습니다. 이들은 기존 학교에서 숙식을 같이하면서 당국의 학교 강제 접수를 막아내는 한편, 기존의 조선인 학교를 일본 공립학교의 분교로 지정해 주도록 요구했습니다.

 

 

시당국의 가이드라인을 지키기 위해 교원들은 수업을 중지했지만 고학년 학생들이 저학년 학생들을 가르치는 식으로 수업을 계속하면서 학교 농성을 이어갔습니다.

 

일본인 학교인 무코 소학교로 가수용된 283명의 조선인 학생들도 순순히 수업을 받지 못했습니다. 교실이 부족해 2부제 수업을 해야 했는데, 갑자기 늘어난 학생들로 일본인 교사들도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1949122일 문제가 폭발했습니다. 일본인 교원으로부터 일본어로 수업을 받던 조선인 학생들은 운동장으로 몰려 나가서 일본어는 모른다, 조선말로 가르쳐라,” “일본어는 이제 끝났다,” “우리 선생님을 왜 따돌렸나,” “일본식 교육은 받지 않겠다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스크럼을 짜고 운동장을 달렸고, 독립가와 같은 노래를 제창하기도 했습니다.

 

이틀 후인 124일 시당국과 조선인학부모대표 사이에 회담이 열렸고, 조선인 측의 요구가 대폭 수용되어 (1) 시장 책임아래 모리베(守部) 조선인학교에 분교를 개설하며, (2) 분교에서는 조선인 교원을 채용하기로 합의했습니다.

 

 

<4.24 한신교육투쟁-민족교육을 지킨 사람들의 기록(1988)>에 따르면 조선학교가 일본 공립학교의 분교 인가를 얻어낸 것은 처음이었고, 이후 아마가사키의 선례를 따라 도쿄와 카나자와, 오사카와 아이치 등에서도 조선학교를 일본학교의 분교로 설립하는 예가 늘어났습니다.

 

 

1950년대 후반 귀국사업(=북송사업)이 활발해지면서 조선말 배워서 조국으로 돌아가자는 표어 아래 학생 수가 급속이 늘자, 오쇼 분교에는 <아마가사키 조선중급학교>가 병설되었습니다. 중급학교의 첫해 학생은 48명 교원은 6명이었습니다. 아마가사키 조선중급학교는 1958년 신교사 공사를 시작, 19593월에 2층 목조건물의 신교사를 완공했습니다.

 

 

한편 분교 형태의 조선초등학교는 1965년부터 자주학교로 이전하려는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일본 시민과 보수층의 지지까지 얻어가며, 1965718, 오쇼와 오시마, 모리베의 각 분교가 통합되어 니시다치바나초 소재 시유지에 신교사를 건립하고, 196641일부터 <오시마 조선초급학교>를 발족시켰습니다.

 

이후 19674월에는 유치반(교원 2, 원아 50)이 신설되었고, 그해 10월에는 아마가사키 조선중급학교와 통합하여, 오늘날의 아마가사키 조선초중급학교가 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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