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플레옐 공연 팜플렛의 최승희 소개는 몇 가지 면에서 이례적이다. 몇 줄의 약력으로 줄일 수 있는 내용이지만 8면 팜플렛의 한 면을 통으로 할애했고, 문단을 자주 바꾸고 읽기 쉬운 단문을 사용해 최승희의 출생과 출신, 무용입문과 성공적인 공연활동을 자세히 소개했다.
살플레옐 공연이 최승희의 유럽 데뷔 공연이었던 만큼 작품 설명에 앞서 무용가 최승희 자신을 알리는데 공을 들인 것은 이해할만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오류와 과장이 포함된 것은 지적해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최승희가 도쿄 무용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것은 1930년이 아니라 1929년이었고, 최승희가 젊은 음악가들과 작곡 활동에 관여했다는 것은 다른 증거가 필요한 주장이며, 미묘한 정치적 지형 때문에 미국 공연이 초기에 중단된 사정은 언급되지 않았다.
특히 최승희가 1934년부터 1937년까지 2백만 명 이상의 관객을 위해 6백회 이상의 공연을 했다는 주장은 숫자를 이용한 호소력있는 표현이지만 물리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과장이었다. 일주일에 3일씩 3천3백명의 관객 앞에서 4년간 공연을 해야 가능한 숫자인데, 당시 조선과 일본에는 객석 3천 이상이 극장은 없었다. 최승희가 자주 공연했던 서울의 경성공회당과 도쿄의 히비야공회당의 수용인원도 2천명 남짓이었다.
사소한 오류와 과장에도 불구하고 이 소개문은 다른 문헌이 언급하지 않은 새로운 사실을 보여준다. 첫째는 최승희의 모교 “숙명여학교”를 소개한 것인데, 숙명여고보 졸업생이 유럽에 공개적으로 소개된 것은 처음이었을 것이다.
1930년대의 숙명여고보는 조선 최고의 여학교임에 틀림없었으나 졸업생들의 대부분은 조선에 머물렀고, 해외 활동도 일본과 중국 등에 국한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최승희 덕분에 ‘숙명여학교’는 유럽에 소개된 최초의 조선 여학교가 된 것이다. 다만 유감인 것은 ‘숙명(淑明)’이라는 원래의 이름이 아니라 ‘슈쿠메이(Shukumei)’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알려진 것이었다. 이는 '최승희(崔承喜)'가 아니라 '사이 쇼키(Sai Shoki)'라고 발음되었던 것과 같은 이유였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무용유학을 떠났던 시기 최승희의 나이가 14세였다고 밝힌 것이다. 출생연도를 비롯해 각종 연도나 최승희 나이를 밝히는 데에 적극적이지 않은 소개문에서 무용입문시기의 나이만 밝혀놓은 것이다.
최승희가 이시이 바쿠를 따라 무용유학에 나섰을 때 경성의 신문들은 최승희가 16세라고 보도했었다. 그러나 이를 14세로 밝힌 살플레옐 팜플렛이 오류를 범한 것은 아니다. 당시 최승희의 만나이가 14세(+4개월)이었기 때문이다.
14세라는 나이를 밝힌 것은 최승희의 천재성을 암시하려는 의도였겠지만, 그와 함께 최승희를 에드가 드가(Edgar Degas, 1834–1917)의 조각작품 <14세의 어린 무희(La Petite Danseuse de Quatorze Ans, 1880)>와 연관시키려는 시도였을 수도 있다.
회화에서도 무용수를 자주 소재로 삼았던 드가는 1881년 제6회 인상파 전시회에 <14세의 어린 무희>를 출품했는데 평가는 좋지 않았고 ‘아즈텍 원주민’이냐는 인종차별적 비난까지 받았다. 그러나 밀랍으로 만들어 인체 질감이 생생하고, 진짜 무용복을 입히고 댕기까지 새틴으로 묶어주어 화제가 되었던 이 작품의 모델은 벨기에 출신의 무용지망생 마리 반 고템(Marie van Goethem)이었고, 드가의 모델이 되었을 때 그녀의 나이가 14세였다.
반세기 동안 화제를 뿌린 후 <14세의 어린 무희>는 마침내 1930년에 오르세 미술관에 영구 소장되었다. 최승희의 파리 데뷔 8년 전이었다. 동양에서 온 새로운 무용가가 ‘14세에 무용을 시작한 무희’로 소개되자 드가에 대한 기억이 생생한 파리 시민들은 <14세의 어린 무희>를 연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 드가의 <14세의 어린 무용수>를 생각하면서 공연에 왔던 파리 시민들은 깜짝 놀랐을 것이다. 드가의 모델 마리 반 고템과는 달리 한국 무용가 최승희는 빼어난 미인이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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