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81217일 프랑스의 호화여객선 파리호에 승선해 뉴욕을 출발한 최승희는 일주일동안 대서양을 건너 그달 24일 오후에 프랑스의 대서양 최대항구 르아브르의 조안네스 쿠베르(Joannès Couvert) 선창에 도착했다. 바로 기차로 갈아탄 최승희는 그날 밤 파리의 상라자레(Saint-Lazare)역에 도착했다. 죠르쥬 생크(George V) 호텔에 숙소를 마련한 최승희는 샹젤리제에 스튜디오를 빌고 공연 준비에 들어갔다.

 

파리의 언론은 최승희를 대대적으로 환영했다. 12(확인)의 일간지가 최승희의 파리 도착을 사진과 함께 1면에 보도했다. 미디어는 최승희의 출신배경과 무용입문, 조선과 일본에서의 성공, 미국을 거쳐 유럽무대 데뷔하게 된 과정을 상세히 보도했다.

 

프랑스 최대항구 르아브르에 입항하는 호화여객선 <파리>호. 최승희는 <파리>호로 뉴욕을 떠나 대서양을 건넌 후 르아브르에 도착했다.

 

유럽 첫 공연이 시작되기 전인 1939112일 파리주재 일본대사관은 최승희 환영리셉션을 열었다. 파리 주재 각국 외교관들과 문화부문의 주요 인사들, 그리고 파리의 기자와 평론가들을 대거 초청되었다. 명시적으로는 일본 여권을 가지고 공연 여행 중인 최승희를 지원하는 행사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전운이 감도는 유럽과 이미 전쟁 중인 아시아의 북새통 속에서 일본의 평화적 제스처를 선전하는 방편이기도 했음에 틀림없다.

 

최승희도 일본 외무성과 외교공관의 이중적 태도를 잘 알고 있었다. 당초 최승희는 남편 안막과 딸 안승자와 함께 세계 순회공연을 치를 예정이었고, 외무성에 3명의 여권을 신청했다. 외무성은 딸 안승자의 여권만 발급을 거부했다. 최승희가 세계 순회공연을 하는 동안 딸을 도쿄에 잡아둔다는 것이었다. 조선 출신의 정상급 예술가 최승희가 반일 행위를 하지 못하도록 하는 한편, 가족과 함께 망명이라도 하게 되는 곤란한 사태를 사전에 방지하려던 것이었다.

 

최승희와 안막은 이같이 족쇄가 채워진 상태에서도 줄 것은 주지만 받을 것은 받는다는 생각이었다. , 일본정부의 평화 제스처의 역할을 담당해 주지만,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 이 순회공연을 통해 조선무용을 세계무용계의 한 장르로 부각시킨다는 계획이었다.

 

최승희의 이같은 줄타기 전략은 그 자체가 상당히 위험한 것이었지만 피식민지 예술가로서는 독립운동을 제외하고 선택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차선의 방법이었을 것이다. 최승희가 이러한 위험한 전략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길 수 있었던 것은 국제정세와 문화운동에 대한 식견이 뚜렷했던 남편 안막 덕분이었을 것이다.

 

1938년 12월24일 르아브르를 거쳐 파리의 상라자레역에 도착한 최승희(왼쪽)와 그가 파리에서 촬영한 <한량무> 모습(오른쪽).

 

이를 위해 최승희는 두 가지 전략을 사용했다. 하나는 자신과 자신의 무용의 정체성을 밝히는 것이었다. ‘자신은 조선인이며 자신의 무용은 조선무용임을 최승희는 강조했다. 자신과 자기 예술의 정체성을 명확히 밝힌 것이다. 일제 공관의 방해와 유럽 언론의 무지 때문에 이같은 시도가 항상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9개월의 유럽 체류를 마치고 마르세이유를 떠날 즈음에는 적어도 그가 공연했던 서유럽에서는 최승희가 자신의 목표를 달성한 것으로 보인다.

 

다른 하나는 공연의 레퍼토리를 특정한 방식으로 구성하는 것이었다. , 개개의 작품들뿐 아니라 그 작품들을 구성과 상호연관성을 통해서도 최승희는 유럽인들에게 조선의 실상을 알리려고 했던 것이다. 그의 발표작품들은 한국 예술사의 주요한 작품이나 사건들을 소재로 한 것이 대부분이었고, 이를 시기별, 계층별, 연령별, 성별로 골고루 제시하기 위해 애썼다.

 

이글에서 최승희의 살플레옐 공연 프로그램을 소개하고 분석하는 것은 이 두 번째 전략이 어떻게 수립, 실행에 옮겨졌고, 그에 대한 관객과 비평가들의 반응이 어떠했는지 살펴보기 위함이다. 이를 위해서 우선 2017년 여름, 80년 만에 발굴된 살플레옐 공연 프로그램을 소개하고, 그 내용을 번역해 제시한 다음, 각 작품들의 내용과 배경을 소개하게 될 것이다.

 

살플레옐 프로그램을 그 이전 미국 공연의 프로그램들과 유럽의 다른 공연 프로그램들과 비교하면 최승희의 유럽공연 의도가 더욱 뚜렷해 질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많은 지면을 요구하는 작업이 될 것이므로, 이번 글에서는 최승희 유럽순회공연 중의 첫 공연인 1939131일의 <살플레옐> 공연 프로그램의 분석에 한정하게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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