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희의 유럽순회공연은 예술 공연 기획사 <국제예술기구>에 의해 기획되었고, 그 실무의 주관은 파리의 대행사 <발말레트>가 맡았다.
기획사와 주관사는 이 순회공연의 일정을 적어도 6개월 전에 확정했고 극장들을 예약했다. 이 예약을 앞당기기는 불가능했고 미룰 수는 있었으나 무거운 벌금을 내야했다. 최승희가 미국공연이 중단된 후에도 바로 유럽으로 가지 못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국제예술기구>가 공연 일정을 마련했지만 최승희는 기획과정에서 자신의 요구를 주장할 수 있었다. 최승희는 공연 극장에 대해 2가지 확고한 선호사항이 있었다. 어느 나라든지 첫 공연은 그 나라 수도의 최대 극장이어야 하며, 극장의 조명이 좋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가 이시이무용단에서 독립해 최승희무용연구소를 설립했을 때도 첫 공연은 경성공회당에서 열었다. 두 번째 일본으로 건너갔을 때도 그의 제1회 발표회는 예약 사정 때문에 불가피하게 일본청년관에서 열었지만 제2회 발표회는 히비야 공회당에서 열렸다. 최승희의 이같은 극장 선호 원칙은 훗날 남미 제국과 중국, 러시아와 동유럽 제국의 순회공연 때도 지켜졌다.
<국제예술기구>는 최승희의 요구를 최대한 충족시켰다. 프랑스 첫 공연을 파리의 살플레옐 극장으로 예약했고, 벨기에 첫 공연은 브뤼셀의 팔레데 보자르 극장, 네덜란드 공연은 암스텔담의 위성도시 할렘의 슈타트 쇼우부르크와 헤이그의 프린세스 극장으로 정했다.
살플레옐 극장은 1939년 1월말 기준으로 파리 최대 극장이었다. 1839년 12월에 개관할 때는 3백석의 소극장이었기 때문에 살(salle, 방)이라는 이름이 붙었으나, 1927년의 재건축 때 3천석으로 대폭 늘었다. 1928년의 화재로 내부가 재건축되었 때 좌석수는 2천4백석으로 조정됐지만, 최승희 공연 당시에도 살플레옐은 객석 수 기준으로 여전히 파리 최대 극장이었다.
그러나 최승희 공연 이후 40일 만에 ‘파리 최대극장’이라는 타이틀은 팔레드 샤이오 극장에게로 넘어갔다. 1939년 3월10일에 개관한 샤이오 극장의 객석수가 2천7백석이었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최승희의 두 번째 파리공연은 그해 6월15일 샤이오 극장에서 열렸다.
살플레옐 공연은 최승희가 파리에 도착한지 한 달 후에 열렸고, 국제예술기구와 발말레트사는 홍보에 충분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다만 홍보 전략에는 혼선이 있었다. 이해관계가 다른 세 주체의 요구가 충돌했기 때문이었다.
최승희은 당연히 자신을 ‘조선인’으로, 자신의 작품들을 ‘조선무용’으로 홍보하고 싶었다. 반면 일본공관은 ‘일본 무용가의 일본 무용’으로 홍보하면서 최승희가 자국 평화사절 역할을 해주기 바랬다. 기획사와 주관사도 ‘일본 무용가’로 홍보되기를 바랬는데 이는 흥행에 더 유리했기 때문이었다.
세 주체의 상이한 요구와 현지 언론인들의 무지가 뒤섞이는 바람에 결국 ‘일본인 무용가의 조선무용’으로 타협이 이뤄졌다. 물론 이 타협은 세 당사자가 한자리에 모여 회의를 통해 결정한 것은 아니며, 언론보도를 통한 밀고 당기기가 계속된 끝에 자동적으로 조정된 결과였다.
일본공관과 기획사/주관사는, 서로 다른 이유 때문이기는 했으나, 최승희를 ‘일본인 무용가’로 홍보하게 된 것에 만족했고, 이후 기획사와 주관사는 언론을 통해 활발한 홍보를 벌였고, 일본 대사관은 파리뿐 아니라 온 유럽의 일본교민들에게 최승희 공연에 참석하도록 독려했다.
1939년 2월14일 파리주재 일본대사관이 본국 외무성에 발송한 보고서에는 “본관이 초대한 이탈리아와 벨기에 양국 대사, 프랑스 외무성 관리, 기타 일본 관계자 등을 포함하여 관객 천육백을 넘어 예상 이상의 성공을 거두었고 신문비평도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는 내용이 담겼다.
최승희는 살플레옐 공연 홍보 과정에서 조선인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일단 양보하는 대신 자신의 발표작품에 ‘조선무용’이라는 말을 쓸 수 있게 된 데에 만족했다. 물론 그것은 사실이었다. 살플레옐 공연의 레퍼토리는 1백퍼센트 조선무용이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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