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발레리아, 김발렌친 선생 부부와 함께 전세버스에 승차한 일행은 우수리스크로 출발하기 전에 독립운동 사적지를 먼저 방문했습니다. 안중근 의사 단지동맹 기념비입니다.

 

 

이 기념비는 크라스키노에서 조선-러시아 국경지대인 하산으로 가는 189번 국도를 따라 서쪽으로 3킬로미터쯤에 위치했는데, 한국 기업 유니베라의 농장 앞에 있습니다.

 

이 기념비는 200110월 광복회와 고려학술문화재단이 공동으로, 크라스키노 북쪽 5킬로미터 지점의 츠카노보(Цуканово) 마을 입구에 세워졌으나, 인근을 흐르는 옌치허(Янчихэ) 강의 잦은 범람으로 기념비가 손상되고 유실되자, 200711월 블라디보스톡 총영사관과 한국 기업 남양알로에가 협력하여 크라스키노 시의 북쪽 외곽으로 기념비를 옮겼습니다.

 

 

그러나 이 지역도 러시아 국경수비대의 작전구역에 편입되어, 군의 사전 허락 없이 기념비를 방문할 수 없게 되자, 20118월 기념비를 확대 보수하면서 현재의 위치로 이전했습니다.

 

안중근 기념비가 처음 설치됐던 츠카노보는, 중국 청나라 시기부터 1937년의 고려인 강제이주 이전에는 옌치우(延秋, 연추)라고 불렸습니다. 이 지역을 흐르는 강, 옌치허(延秋河)를 딴 이름이라고 하지만, 옌치허가 옌치우를 따랐을 수도 있겠지요.

 

 

옌치우의 한자 표기가 延秋, 烟秋, 煙秋 등으로 다르기는 한데, 발음은 모두 옌치우입니다. 1860년의 베이징 조약으로 연해주가 러시아에 할당된 뒤 옌치우는 시모노보(Симоново)라는 러시아 이름으로 바뀌었는데, 지금(Сим-) 새로(-ново) 얻은 땅이라는 뜻이었을 겁니다.

 

1864년 지신허로 이주하기 시작한 고려인들의 인구가 늘자 1868년부터 시모노보 지역으로 이동해 정착촌을 만들면서 고려인들은 이를 다시 연추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의 이름이 러시아어로도 얀치헤(Янчихe)로 굳어진 것은 고려인들의 관행 덕분이었을 것입니다.

 

 

고려인이 더 증가하면서 연추는 3개 마을로 확장되어, 상연추, 중연후, 하연추라고 불렸는데, 1937년의 강제이주 이후 상, 중연후는 폐쇄되고, 지금의 츠카노보는 하연추에 러시아인들이 계속 거주하면서 유지된 마을입니다. 하연추는 연추 하리(下里)라고 불리기도 했더군요.

 

안중근 의사 단지동맹 기념비가 처음에 츠카노보에 세워진 것은 그곳이 단지동맹의 현장이기 때문입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안중근 의사는 애국계몽운동에 뛰어들었고,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된 후에는 강원도와 황해도에서 의병 활동을 전개했으나 한계를 느끼고 결국 연해주 연추 마을로 망명, 그곳에서 의병운동에 투신했습니다.

 

 

그는 연해주의 의병장 전제익(全濟益)의 휘하에서 우영장(右營將)의 지위로 19087월 휘하 1백여명의 부대원을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경흥군 노면으로 진격, 일본군 수비대를 전멸시켰습니다. 이어서 경흥군 신아산 부근에서 일본군과 교전해 전과를 올리기도 했으나, 사로잡은 일본군 포로를 국제공법에 따라 석방하는 바람에, 이 포로들의 제보로 안중근 부대의 위치가 발각되어 의병 부대가 전멸, 그는 다시 연해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이후 안중근은 블라고슬로벤노예(四萬里, 사말리)에서 수찬(水淸, 파르티잔스크)에 이르기까지 두루 다니면서 다시 의병운동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실패했습니다. 포로 석방 사건으로 그 자신도 신임을 잃었고, 국내 진격의 실패로 연해주의 무장투쟁 열기가 식었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분위기를 일신하기 위해 시도한 것이 단지동맹(斷指同盟)입니다. 190927(양력 226) 안중근을 비롯한 열혈 독립운동가 12명이 연추 하리 마을에 모여 왼손 약지 손가락의 끝마디를 함께 자르면서 독립운동에 목숨을 바치기로 맹세한 것이지요.

 

 

당시 맹원들은 3년 내에 이토 히로부미와 이완용을 척살하지 못하면, 자신들이 자결한다는 각오를 다졌고, 손가락을 잘라 솟구치는 피로 태극기에 대한독립이라고 썼습니다.

 

 

이 태극기는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고, 우리가 방문한 크라스키노의 단지동맹 기념비는 바로 그날의 역사를 기념하기 위해 건립된 것이었습니다. (jc,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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