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라스키노 전망대의 승전기념상 <하산의 영웅들>1938729일부터 811일까지 하산 호수 인근의 장고봉(張鼓峰, 러시아명 сопка Заозёрная/Zaozyornaya)에서 벌어진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러시아가 승리한 것을 기리는 조각상입니다.

 

 

하산호에서 호수 해발 155미터의 장고봉은 일본과 러시아 사이의 영토분쟁지역이었습니다. 장고봉의 북쪽에는 두 개의 고지가 더 있었습니다. 장군봉과 사초봉(沙草峰, 러시아명 сопка Безымянная/Bezymyannaya)이 그것입니다.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1932년 괴뢰국 만주국을 세운 일제는 장고봉이 만주국 영토라고 주장했고, 러시아는 연해주를 할양받은 베이징 조약(1860)과 에 따라 장고봉의 정상을 경계로 국경이 설정됐으므로 적어도 장고봉의 동쪽 사면은 러시아의 영토라고 주장했습니다.

 

 

일본군 기록에 따르면 하산호 전투의 직접적인 빌미를 제공한 것이 러시아였습니다. 76일 러시아군이 장고봉과 사초봉에서 진지 공사를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일제 관동군과 조선군은 일본 대본영 참모부에 이를 보고했고, 1938720일 조선군 19사단 75연대가 공격을 감행 장군봉(20), 사초봉(29), 장고봉(30일밤)을 차례로 점령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군 기록에 따르면 국경지역을 지속적으로 도발한 것은 일본이었습니다. 일본군은 19342, 첫 도발을 시작한 이래, 19343월과 4월에도 월경을 시도했고, 그해 7월에는 6, 8월에는 20, 9월에는 47회의 도발을 감행해, 국경 도발의 빈도가 높아졌습니다.

 

 

1935년에도 1-7월까지 일본 항공기가 소련 영공을 24회 침입했고, 소련 영토에 대한 포격이 33, 만주국과 일본 선박이 아무르강 경계를 위반한 것이 44건에 달했습니다. 1936년부터 19387월 하산호 전투가 시작되기까지 일본군과 만주군은 총 231건의 소련 국경을 침범했는데, 육상 침범이 124, 영공 침입이 40건이었고, 그중 35건에서 교전이 발생했습니다. 러시아군이 장고봉과 사초봉에 진지를 구축한 것은 일본군의 도발에 대항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장고봉을 일본군에 내어주면 포시에트와 블라디보스톡이 위협받게 되지만, 이 지역을 장악하면 만주와 중국 북부로 진출할 교두보를 얻게 된다는 평가 아래, 러시아군은 81일부터 극동군 40사단의 3천명의 병력과 탱크를 포함한 기계화부대를 동원해 장고봉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82일부터는 극동군 사령관 블류헤르 원수가 직접 전투를 지휘하기 시작했습니다.

 

 

소련군은 86일부터 1개 군단과 1개 기계화여단, 연해주 항공대를 동원해서 대반격을 개시했지만, 일본군은 휴전협상이 시작된 811일까지 장고봉과 사초봉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확전을 바라지 않았던 러일 양국은 주러 일본대사 시게미츠 마모루와 소련의 외무인민위원 막심 리트비노프의 회담으로 811, 모스크바에서 정전 합의에 도달했습니다. 합의 내용은 811일 정오로 전투를 중지하고 소련의 주장대로 국경선을 확정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일본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으면서 지켜낸 장고봉과 사초봉을 소련에 반환했습니다.

 

 

당시 소련은 이 전투를 대단히 중요하게 여겼던 것으로 보입니다. 일제의 연해주 진출을 저지하고, 거꾸로 소련의 중국 북부 진출의 발판으로 삼으려는 스탈린의 계산 때문이었습니다.

 

 

더구나 하산호 전투는 러일 전쟁(1904)의 굴욕적인 패배 이래 일본과 맞붙은 첫 전투였기 때문에 반드시 이기려는 복수심리가 작용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장고봉을 돌려받은 소련도 막대한 피해를 입었지만 원하던 결과를 성취했고, 이를 대대적으로 자축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초기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장고봉과 사초봉을 빼앗긴데다가, 초기의 소극적이고 방만한 작전으로 전투에 임했던 책임을 물어 스탈린은 극동군 사령관 바실리 블류헤르 원수를 체포했습니다. 블류헤르는 모스크바로 압송되어 고문당하다가 18일 후에 옥사했습니다.

 

 

당시 군부에 대해서도 대숙청을 벌이고 있었던 스탈린은, 이 중요한 대일 전초전에서 자신의 자존심에 상처를 낸 지휘관을 그냥 둘 수 없었던 것입니다. (jc,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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