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순클럽(대표 이고은)>이 한국에 초청한 또 한명의 학생대표는 사미아 악타르(Samia Akther)씨입니다.

 

사미아씨는 다카대학 법과대학원에 재학 중, 지난 7-8월의 몬순혁명에 참가했고 반정부 시위의 조직리더(coordinator)로 활동했습니다. 조직리더이란 시위를 기획하고 학생들의 참여를 유도하고 시위대를 지휘하는 역할입니다.

 

 

사미아씨가 사전에 보내온 영상 및 서면 자료에 따르면 방글라데시의 몬순혁명은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습니다. 이 전 과정은 사미아씨가 시위조직 리더로서 주도했거나 직접 목격한 것이라고 합니다.

 

공무원 할당제

 

714일 하시나 전총리는 기자회견에서 시위대를 라자카르(Razakar, রাজাকার)"라고 모욕했습니다. 당시 하시나의 발언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자유투사(freedom fighters)의 자손들이 공무원 할당 혜택을 받지 못한다면, 그 혜택이 라자카르의 자손들에게 가지 않겠는가?“

 

 

1971년 방글라데시가 파키스탄의 압제와 차별대우에 저항해 독립전쟁을 일으켰을 때, 독립투사의 투쟁을 방해한 민병대가 라자카르였습니다.

 

예수를 배신한 가룟유다, 일제강점기 일제에 빌붙어 조선인들의 독립운동을 방해하던 간도특설대 같은 존재라는 말입니다.

 

1971년 독립직후 방글라데시 정부는 공직 할당제를 도입했습니다. 독립을 위해 싸운 자유투사들에게 30%, 독립전쟁 중에 강간당한 여성들에게 10%, 저개발지역 출신자에게 40%의 공직을 할당했습니다. 최초의 공직할당제로 80%의 공직이 특정 계층에 할당되었고, 20%만이 공개 채용에 할당되었습니다. 1972년에 시작된 이 공무원 할당 제도는 이후 46년간 지속되면서 자유투사들의 자녀들까지 그 혜택을 받았습니다.

 

이에 공무원 할당제가 차별적 제도라는 주장이 대두되어 개혁운동이 일어났고, 2018년 방글라데시 대법원은 공무원 할당제가 위헌이라는 이유로 이를 크게 폐지했습니다.

 

 

하시나 정권은 2022년 공무원 할당제의 재도입을 위해 소송을 제기하게 했고, 202465일 대법원이 공무원 할당제가 합헌이라면서 하시나 정권의 손을 들어주자, 이후 방글라데시 공무원 일자리의 30%를 다시 자유투사들의 손자들에게 할당한 것입니다.

 

여성과 소수민족, 장애자 등의 소수계층에 할당된 공직을 합치면 56%의 공무원 일자리를 제외한 44%의 공무원 일자리가 일반인들에게 할당되기에 이른 것입니다.

 

내가 라자카르.

 

문제는 최근 방글라데시의 청년 실업률이 15%를 넘어섰다는 점입니다. 이는 전체 실업률보다 3배나 높습니다.

 

대학을 졸업해도 취업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대학졸업자 중에서 20%2년 이내에 취업하지 못합니다. 공무원 일자리마저 절반 이상이 할당제로 돌려진다면, 취업 가능성은 더욱 희박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할당제 이전의 방글라데시 공무원 취업 경쟁률은 100대1이 넘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공무원 할당제가 재개된다면 공무원 취업 경쟁률은 2배로 증가해 200대1에 근접하게 됩니다. 

 

이에 대학생들은 공무원 할당제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발표된 202465일부터 공무원 할당제 개혁을 요구하는 시위를 시작했고, 하시나 정부는 이를 탄압했습니다.

 

이같은 상황에서 하시나 총리가 714일의 기자회견에서 시위대를 배신자들이라고 몰아붙인 것이지요.

 

 

이날 전국의 대학생들은 하시나의 모욕적 발언에 분개했고, 본격적으로 시위를 조직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미아씨도 다카대학교 여학생 기숙사 학생들의 야간 시위를 주도했습니다. 당시 학생들의 구호는 내가 라자카르다.(আমি রাজাকার)“였습니다.

 

다카대학교 여학생들의 시위 영상을 보면, 선창자가 너는 누구냐, 나는 누구냐?“고 물으면, 시위대가 소리 높여 라자카르, 라자카르하고 외치면서 행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তুমি কে? আমি কে? (Tumi Ke? Ami Ke? = 'Who are you? Who am I?)

রাজাকার, রাজাকার। (Razakar, Razakar.)

 

그런데 이 구호는 1971는 파키스탄과 그 앞잡이 라자카르에 대항해 독립투사들이 외치던 구호를 변형한 것입니다. 당시의 구호는 이와 같았습니다.

 

তুমি কে? আমি কে? (Tumi Ke? Ami Ke? = 'Who are you? Who am I?)
বাঙালি, বাঙালি (Bengali, Bengali!)

 

흥미로운 사실은 라자카르라는 말은 아랍어 레다카렌(رضا کار)’에서 유래한 말로 자원봉사자(volunteer)"라는 뜻입니다. 하시나는 시위대를 가리켜 배신자들이라고 매도했지만, 시위대는 이에 맞서 그래, 내가 자원봉사자다라고 맞받아친 것입니다.

 

 

더 나아가 시위대는, 방글라데시 독립 반세기가 경과한 지금, 하시나 정권이 파키스탄의 독재체제나 다름없으며, 자신들이 방글라데시의 새로운 자유투사라고 주장한 셈입니다.

 

하시나 정권의 탄압

 

714일 밤 다카대학 여학생들의 격렬한 시위를 계기로, 이튿날부터 정부는 군경과 여당지지자들을 투입해 대학생들을 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715일 다카대학교 캠퍼스에서 평화적 시위가 개최되었을 때, 하시나 지지자들이 몽둥이와 하키스틱으로 휘두르며 시위대를 습격했고, 군경은 총을 발사했습니다.

 

여학생들의 시위에 폭력을 휘두른 것은 방글라데시 역사에서 전례가 없는 일이라고 합니다. 여학생들이 부상자를 인근 다카대학병원으로 옮기자, 여당지지자들은 병원 안으로까지 침입해 테러를 가했습니다.

 

 

716일 반정부 시위대 중에서 첫 사망자가 발생했습니다. 베굼 로케야(Begum Rokeya) 대학교 학생 아부 사이드(Abu Sayed)가 진압 경찰의 총격에 맞아 사망한 것입니다.

 

이날 시위에서는 아부 사이드를 포함 6명의 학생들이 사망했고, 수백 명이 중상을 입었습니다.

 

사망자가 발생하자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됐습니다. 여당지지자들이 학생들을 대학교 기숙사에 감금하고 린치를 가하거나 고문을 자행했지만, 사미아가 조직한 여학생 시위대는 다카대학교 기숙사 정문에서 시위를 계속했습니다.

 

717일 아부 사이드의 장례식과 기도회가 다카대학교 캠퍼스에서 열렸습니다. 장례식이 끝난 후 430분경부터 학생들은 관을 운구하면서 캠퍼스를 행진했고, 경찰은 장례 행진에 소음수류탄과 최루탄을 난사했습니다.

 

 

이날 다카대학교에 무기한 휴교령이 내려졌고, 모든 학생들은 기숙사에서 나가라는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휴교령과 기숙사 퇴거명령이 진행되는 가운데서도 경찰은 소음수류탄을 투척했습니다. 학생들은 강압적으로 기숙사를 떠나야했습니다.

 

인터넷 폐쇄와 전국적 통금조치

 

719일부터 하시나 정권은 전국의 인터넷을 폐쇄하고 통금을 실시했고, 그와 함께 군대를 배치하기 시작했습니다. 군대는 무작위로 학생들을 연행했고, 경찰과 기타 정부요원들도 시위대를 체포했습니다.

 

다카시 경찰국(Dhaka Metro Police)717-18일 이틀 동안 1,117명을 체포했다고 발표했습니다.

 

경찰의 체포와 연행으로 시위대 조직리더 6명이 구금되었고, 경찰은 이 6명의 학생들을 협박해 모든 시위를 중단하라는 성명서를 낭독하게 했습니다.

 

 

인터넷 폐쇄로 발생한 통신 부재의 상태에서 하시나 정권은 (1) 대량 학살, (2) 과도한 폭력, (3) 잔인한 공격, (4) 구금과 고문, (5) 살상, (6) 정보 억압 등의 만행을 자행했습니다.

 

이같은 조치들은 방글라데시가 민주국가인지 의심하게 만들었습니다. 강제실종, 사법외 살인, 무작위 체포, 폭력행사 등이 수시로 하시나 정권에 의해 자행되었지만, 7월의 반정부 시위대에 가해진 하시나 정권의 반민주적 탄압은 극에 달했습니다.

 

정권 퇴진운동의 시작

 

이때부터 공무원 할당제 개혁요구시위는 하시나 정권 타도 운동으로 확대됐습니다.

 

하시나 정권의 (1) 국민의 투표권 박탈, (2) 표현의 자유 박탈, (3) 언론 탄압, (4) 야당 탄압, (5) 부정부패, (6) 돈세탁, (7) 학생 테러조직 운영 등이 집중적으로 비판되기 시작했습니다.

 

공무원 할당제 개혁 요구가 하시나 정권 타도 운동으로 번지면서, 학생들이 주도했던 반정부 시위에 일반 시민들이 대거 참여했습니다.

 

이같은 학생-시민의 시위로 결국 권위주의적 정권을 무너뜨리기에 이르렀는데, 이는 지난 15년 동안 억눌렸던 분노가 폭발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시위는 날로 증폭되었고, 하시나 정권은 군대와 경찰에게 즉각사격(shoot at sight)의 발포명령을 내렸습니다. 총격 사망자 수는 650(공식)-1,000명 이상으로 늘어났습니다.

 

학생과 시민의 희생자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자, 군대와 경찰은 하시나의 발포명령을 더 이상 따르지 않기로 결정하고 통보했습니다.

 

 

85, 시위를 저지할 방편이 없어진 하시나는, 학생들과 시민들의 시위대가 총리공관으로 행진해 들어오는 가운데, 급히 사임하고 헬기와 항공기를 이용해 인도로 망명했습니다. 이로써 15년간 계속된 하시나 정권의 독재적, 권위주의적 통치가 막을 내렸습니다.

 

과도기의 정의

 

87, 몬순혁명의 학생 대표들은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무함마드 유누스를 임시과도정부의 수반으로 추천했고,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하시나 정권의 탄압으로 방글라데시를 떠나 파리에 체재 중이던 유누스는 이를 수락했습니다.

 

임시과도정부는 성공한 혁명을 안착시키고 방글라데시를 민주사회로 이행시키기 위해 다음과 같은 6개 부문의 개혁을 시작했습니다.

 

 

(1) 진실 발굴: 인권위반 행위를 조사하고, 피해자들의 현황을 파악하며, 정부기관에 의해 살상 피해를 입은 피해자들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한다.

(2) 형사 기소: 모든 형태의 범죄를 자행한 하시나 정부의 책임자들과 공범들을 기소해 재판에 회부한다.

(3) 보상 회복: 피해자들에게 국가의 사과를 전달하고, 금전적 보상과 재정 지원을 제공하고, 공동체를 재건하기 위한 사회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4) 제도 개혁: 경찰, 군대, 사법제도 등이 인권을 유린하고 형사사법 원칙을 위반하지 못하도록 제도와 기관들을 개혁한다.

(5) 국민 참여: 피해자와 시민사회, 그리고 피해를 입은 공동체들의 요구에 부응하고, 이들의 의견이 반영될 수 있는 제도와 프로그램을 시작한다.

(6) 문화 책임: 인권에 대한 책임과 존중을 증진시키는 사회 규범을 진작하여, 장기적인 평화와 안정에 기여한다.

 

국제사회의 협력 요청

 

사미아씨는 자신의 발표문에서 방글라데시가 민주사회로 순로롭게 진행할 수 있도록 국제사회의 관심과 협력을 요청했습니다.

 

 

(1) 진실 위원회가 그 책임을 다할 수 있도록 인권 위반 사례나 사실들을 알려주세요.

(2) 진실 위원회와 법제도 개혁 위원회가 과도기 정의를 구현할 수 있도록 지방정부와 시민사회에 필요한 기술적 지원과 자원을 제공해 주세요.

(3) 과도정부가 국제적인 인권기준을 유지하도록 요구함으로써 과도기 정의의 기본틀이 유지되도록 후원해 주세요.

(4) 반인권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들을 국제재판소나 국내재판소로 기소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시고, 향후 유사한 범죄가 발생하지 않도록 후원해 주세요.

(5) 국제적 인권 규범에 부합하는 과도기 정의의 원칙을 유지하고, 다른 나라들도 유사한 기준을 채택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세요.

 

방글라데시 여성의 사회적 지위

 

한편, 방글라데시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매우 모순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지난 35년 동안 방글라데시의 국가수반은 여성이었습니다. 칼레다 지아(1991-1996, 2001-2009)와 셰이크 하시나(1996-2001, 2009-2024)가 그들입니다. 여성 총리의 리더십 아래 모든 정부기관은 33%이상의 여성 지도자들을 임용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또 대학생들에 의해 시작된 이번 몬순혁명에서도 여학생들의 참여율이 높았고, 반정부 시위를 주도한 사미아와 같은 여성들의 활동도 돋보였습니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방글라데시 여성의 초중등학교 취학률은 대략 51%로 남성보다 비슷하거나 더 높지만, 대학과 대학원 등의 고등교육기관 취학률은 남성의 절반에 불과합니다. 202342개 공립대학 여학생 비율은 37%, 103개 사립대학 여학생 비율은 28%에 머물고 있습니다.

 

방글라데시 여성의 아동 결혼률이 매우 높습니다. 2020년 통계에 따르면, 18세 이전에 결혼하는 여성이 51%, 이중 15세 이전에 결혼한 여성은 15%에 달합니다. 그나마 이는 1970년의 93%77%에 비하면 많이 낮아진 수치입니다.

 

 

2023년 여성의 취업률(37%)은 남성(80%)의 절반 이하이며, 노동인구 중 여성의 실업률(5.9%)은 남성(2.8%)에 비해 두 배나 높습니다.

 

즉 방글라데시 여성들은 남성들에 비해 고등교육과 취업의 기회를 절반밖에 갖지 못하고 있으며, 대부분 가정생활과 저임금취업에 묶여 있다는 뜻입니다.

 

 

또 대학교의 여학생들은 재학 중 학업이나 생활에서 불이익을 겪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습니다. 특히 캠퍼스에서 교수나 남학생들에게 성희롱이나 추행을 당하는 경우가 많으며, 심지어 기숙사에서의 강간사건도 빈번한 것으로 보고되고 있습니다.

 

이 같은 여성의 불이익은 점차 개선되는 추세이기는 하지만, 방글라데시의 여성의 지위는 아직도 세계 최하 10개국으로 분류될 정도입니다.

 

 

다만, 몬순혁명과 함께 방글라데시가 민주사회로 빠르게 이행한다면, 가정, 교육과 취업 등의 사회생활에서의 남녀의 격차도 빠르게 줄어들 것으로 기대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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