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826<몬순클럽> 이고은 대표는 방글라데시로부터 이메일을 한 통 받았습니다. 다카의 시민활동가 무스타인 자히르(Mustain Zahir)씨가 보낸 이메일이었습니다.

 

 

자히르씨는 몬순혁명의 경과와 결과를 알리면서, 한국 시민들의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의 이메일은 이 시리즈의 7. 다카(ঢাকা)에서 온 편지에 원문과 번역문이 게재되어 있습니다.)

 

 

자히르씨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KDF)>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 글로발 포럼에 참여하게 되어 있었지만, 별도로 몬순혁명의 학생 대표를 한국에 초청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학생 대표들이 몬순혁명을 한국 시민들에게 알리고, 혁명 과정에서 사망한 희생자들의 조사와 기록, 유가족 예우, 책임자 처벌 등에 대한 한국의 경험을 배우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고은 선생이 내게 자히르씨의 요청을 알려주었을 때, 시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রবীন্দ্রনাথ ঠাকুর,1861-1941)가 생각났습니다. 그는 인도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방글라데시 사람이기도 합니다. 타고르의 고향이 벵골만의 콜카타이고, 그의 시는 대부분 벵갈어로 쓰였습니다.

 

 

그는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였던 시기에 태어났고, 인도가 독립하기 전에 사망했지만, 인도와 방글라데시에서 모두 존경을 받습니다. 인도의 국가 "야나 가나 마나(Jana Gana Mana, 원래의 벵갈어 제목은 ভারত ভাগ্য বিধাতা )"와 방글라데시의 국가 "아마르 쇼나르 방글라(  আমার সোনার বাংলা , Amar Shonar Bangla)"는 타고르의 노래입니다. 

 

 

타고르는 방글라데시의 독립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방글라데시가 파키스탄의 일부이던 시기, 파키스탄 정부가 벵갈어 탄압으로 타고르의 작품을 국영언론에서 방송하지 못하도록 금지하자, 이에 대한 반발이 독립전쟁으로 이어졌고, 방글라데시는 1971년 독립했습니다그만큼 타고르의 시가들이 방글라데시 시민들의 정신세계에 중요한 자양분이 되고 있었다는 뜻이겠습니다.

 

 

그런데 타고르는 한국인에게도 고마운 시인입니다. 1929년 일본을 방문한 타고르는 조선 방문 요청을 수락하지 못한 것을 미안하게 여기면서, 6행의 영문 메시지를 써 주었습니다. 이 메시지는 4행시로 번역되어 192942일자 <동아일보>에 게재되었고, 다음날(4/3) 신문에는 타고르의 필체로 메시지의 원문도 실렸습니다.

 

일찍이 아세아의 황금시기에

빛나던 등촉의 하나인 조선

그 등불 한 번 다시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삼일만세운동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지만, 조선의 독립은 요원했고 조선인의 좌절은 깊어갔습니다. 이때 아시아인으로서 처음으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타고르가 보낸 메시지는 조선민중에게 큰 위안이 되었고, 저항과 독립을 위한 용기를 북돋아주었습니다.

 

타고르의 예언대로 해방 후 한국은 다시 한 번 등불을 켰고, 동방의 밝은 빛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특히 방글라데시의 민중은 대한민국의 민주화와 경제성장을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고 합니다.

 

 

자히르씨는 한국의 성공회대학교 사회학과 대학원에서 한국의 민주화 과정을 전공한 재원으로, 그는 방글라데시의 몬순혁명은 사건의 전개와 그 정신에 있어서 광주의 518항쟁과 유사성이 많으며, 그 정신이 나같은 방글라데시 사람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고 전했습니다.

 

조선이 가장 암울하던 시기에 조선인들을 위해 희망을 노래해 주었던 타고르를 생각하면서, 이고은 선생과 저는 방글라데시 젊은이들의 요청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한 세기 전에 타고르에게 진 민족의 역사적 은혜를 갚을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몬순클럽>의 첫 번째 방글라데시 캠페인은 이렇게 결정됐습니다. (jc, 2024/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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