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 영화제(1939)는 베네치아 영화제(1932), 베를린 영화제(1951)와 함께 유럽의 3대 영화제로 꼽히지만 1938년까지만 해도 미국의 아카데미(1929)를 제외하면 국제 영화제로는 베네치아 영화제가 유일했다. 

1932년 베네치아 비엔날레의 일부로 시작된 영화제는 1933년을 건너뛰고 1934년부터 연례행사로 전환되고 경쟁 부문이 도입되어서 1938년에 여섯 번째를 맞았다. 1937년의 5회 대회에서는 프랑스의 쟝 르노아르(Jean Renoir) 감독의 <거대한 환상(La Grande Illusion, 1937)>이 “최고 예술상(Prix du meilleur ensemble artistique)”을 받았다.

<거대한 환상>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발흥한 극우 민족주의와 파시즘을 경계하고 임박한 또 다른 전쟁을 경고하는 반전 평화 영화였다. 이 영화는 프랑스에서만 1천2백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면서 대성공을 거두었고, 유럽 각국에서 절찬리에 상영되었다. 

 

 

1938년 제5회 베네치아 영화제에서 최고 예술상을 수상한 쟝 르노아르 감독의 <거대한 환상> 포스터.


그러나 독일의 히틀러와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는 이 영화에 분노했다. 특히 독일의 선전상 요제프 괴벨스(Paul Joseph Goebbels, 1897-1945)는 이 영화를 “공공의 적 제1호”로 규정하면서 독일에서 상영되던 <거대한 환상>의 필름을 압수해 파괴했다. 1940년 독일군이 파리에 입성했을 때에도 괴벨스의 첫 명령 중에는 <거대한 환상>의 원본과 복사본을 모두 압수해 파괴하라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거대한 환상>에 대한 독일과 이탈리아 정부의 분노는 이듬해의 베네치아 영화제에도 반영됐다. 이 두 정부가 수상작 선정에 개입한 것이다. 괴벨스는 독일 영화가 수상하도록 압력을 넣었고, 그 때문에 다큐멘터리 영화는 수상작에 포함될 수 없다는 규정을 무시한 채 독일의 레니 리펜슈탈(Leni Riefenstahl) 감독의 <올림피아(Olympia)>가 해외작품상을 받았다.

최우수 작품상도 무솔리니의 아들  비토리오 무솔리니(Vittorio Mussolini)의 후원을 받아 고프레도 알레산드리니(Goffredo Alessandrini) 감독이 제작한 <파일럿, 루치아노 세라(Luciano Serra, pilota, 1938)>에게 돌아갔다. 당시 베네치아 영화제의 수상 결정은 여론이나 투표가 아니라 주최 측이 결정하는 방식이었으므로 이 같은 비정상적인 결과가 나올 여지가 있었다. 

정치적으로 편파적인 이 같은 수상 결과를 놓고 미국과 다른 유럽국 영화인들이 분개했다. 영국과 미국의 대표단은 즉각 베네치아에서 철수하면서 다시는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프랑스에서는 정계와 예술계를 중심으로 새로운 국제 영화제를 조직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베네치아 영화제가 이탈리아와 독일 전체주의 입김에 좌우되기에 이르자, 미국과 프랑스 등은 새로운 영화제를 조직하기로 결정하고, 1939년 9월 첫번째 칸 영화제가 기획되었다.



새로운 영화제 조직에 발 벗고 나선 것은 프랑스 교육예술부의 영화 담당 차관 필리페 에르랑거(Philippe Erlanger)였다. 프랑스 정부 대표로 베네치아 영화제에 참여했던 그는 수상작 선정 결과에 분노한 나머지 귀국행 열차 안에서 바로 새로운 영화제를 구상했고, 이를 쟝 쟤(Jean Zay) 교육예술부 장관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처음에는 프랑스 정부는 새로운 영화제 조직가 그다지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1938년 9월30일에 체결한 뮌헨 협약 때문이었다. 이 협약으로 프랑스와 영국, 이탈리아 정부는 유럽 평화를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히틀러의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을 사후 승인했었다. 간신히 조성한 유럽의 평화 분위기를 해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영화인들과 관객들도 프랑스가 새로운 영화제를 만드는 것에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다. 직전 해에 <거대한 환상>이 베네치아 영화제 최고상을 수상한 데에 만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몇 달 지나지 않아 프랑스 정부는 프랑스 영화제 조직안을 승인했다. 미국이 유럽의 새로운 영화제를 환영하고 나섰기 때문이었다. 거기에는 정치적 목적 외에도 할리우드 영화의 수입권을 둘러싼 경제적인 이유도 개입되어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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