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6년 3월25일 오후 3시경, 최승희는 대구에 도착했다. 경성에서 나서 자란 그녀가 다른 도시에 발을 디딘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당시 최승희의 나이는 16세, 숙명여학교를 졸업한지 3일만이었고, 무용 입문 첫날이었다.
이후 40년 동안 최승희는 조선의 20여개 도시와 일본의 40여 도시, 그리고 중국과 러시아, 유럽과 남북미의 40개 이상의 도시에서 무용 공연을 했다. 1969년 사망할 때까지 세계 각지의 1백 개가 넘는 도시를 누볐지만 최승희의 생애 첫 방문지는 대구였다.
대구 방문 3일 전인 3월23일 최승희는 경성의 명문 여학교 숙명을 졸업했다. 최승희의 4학년 성적은 평점 90.5점으로 17회 졸업생 76명 중 8등이었다. 턱걸이로 90점을 넘긴 덕분에 9명의 우등졸업생 명단에 올랐는데, 그해 수석 졸업생은 평점 99.9점을 기록한 박경순이었다. 필명 박화성으로 이미 등단해 있었던 박경순의 졸업 성적 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
명문 숙명여학교를 꽤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지만 최승희는 우울했다. 76명의 졸업생 중에서 진로가 막막한 유일한 학생이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그날 저녁 오빠 최승일의 졸업 선물이 그녀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경성공회당에서 열린 이시이 바쿠의 무용 공연을 관람한 것이다.
일본 근대무용의 선구자 이시이의 공연을 본 최승희는 그 자리에서 무용 입문을 결심했다. 공연 후 대기실로 찾아간 최승희는 이시이 바쿠로부터 입문 허락을 받았다. 다음날 부모님의 허락을 받아냈고, 일본으로 건너가기 위한 도항증도 발급받았다.
번갯불에 콩 볶듯 도일 준비를 마친 최승희는 25일 아침 9시 경성역 2층 식당에서 가족과 이시이무용단이 모인 가운데 입단 계약을 맺었다. 3년간의 일본 무용 유학이 시작된 것이다.
경성역 플랫폼에서 벌어진 어머니와의 이별은 다음날 아침 <매일신보>에 보도될 정도로 요란했지만, 그녀의 슬픔은 이내 잦아들었다. 첫 기차여행의 흥분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앞날에 대한 기대와 불안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시이 바쿠는 자서전 <춤추는 바보>에서 기차가 용산역을 지날 무렵 최승희는 차창을 바라보며 학교에서 배운 창가를 부르고 있었다고 회상했다.
오전10시 경부선 2등칸에 올라 경성을 출발한 이시이 무용단은 오후 3시경 대구역에서 하차했다. 다음날인 26일 저녁 7시에 <대구극장>에서 공연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이시이무용단의 조선 순회공연 일정은 경성(3월21-23일)과 인천(24일), 대구(26일)와 부산(27-28일)으로 잡혀 있었다.
그날 이시이무용단의 대구 숙소가 어디였는지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아마도 대구역과 대구극장에서 가까운 일본식 여관이었을 것이다. 경성에서도 역과 공회당의 중간 지점에 있는 일본식 하라카네(原金)여관에 묵었었다.
1923년 대구여관조합에서 발간한 안내책자에 따르면 당시 대구역 근처에는 11개의 여관이 밀집해 있었다. 덴야(天屋), 하나야(花屋), 카야케(栢家), 요시다(吉田), 타다야(唯屋), 다나카(田中), 츠타야(ツタ屋), 시라누이(不知火), 고야마(小山), 모리타(森田)여관 등이 그것이었다. 이중 타다야 여관이 최고급이었고 다른 여관들은 중소규모로 값이 저렴했다. 2등칸 기차로 여행하던 이시이 무용단으로서는 타다야 여관을 제외한 다른 여관 중에서 숙소를 선택했을 것이다.
무용단원들은 숙소에 짐을 풀고 저녁식사를 마친 후, 다음날 공연을 위한 음향과 조명을 설치하기 위해 <대구극장>으로 향했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할 일이 있었겠지만, 입단 첫날인 최승희는 어쩔 줄 모르고 따라만 다니고 있었을 것이다. 무용 수업에는 엄격했지만 일상생활에서는 자상했다는 이시이 바쿠가 최승희에게도 무언가 역할을 맡겼을 것임에 틀림없다.
숙소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었을 때 최승희는 그날 이른 아침 체부동 집을 나서 대구의 여관방에 눕기까지를 곰곰 되새겨 보았을 것이다. 돈이 없어 수학여행을 가지 못했던 그녀로서는 그날 밤이야말로 집을 떠나 여관 잠을 자게 된 첫날이었다. 이후 최승희는 숱한 여관과 호텔 잠을 자야 했지만, 아마도 대구에서의 그 첫 밤을 평생 잊지 못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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