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다객 이헌구가 <청색지> 창간호에 기고한 “경성 다방 성쇠기”를 중심으로 1920년대와 그 이전의 끽다 관행과 끽다점에 대해 정리해 보았다. 이헌구의 글은 조선 근대 끽다객들이 향유하던 끽다 문화에 대해 귀중한 정보를 전해 준다. 그러나 이 글은 몇 가지 오해의 여지를 남기도 했고, 그 중 일부는 이글을 통해 바로 잡을 수 있었다.
노다객 이헌구가 서술하지 않은 중요한 사실은 조선인들의 끽다 관행과 끽다점 문화가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 연원이 깊다는 것이다. 이헌구는 한국의 끽다문화가 1923년 진고개에 개업한 <후타미>와 1927년 관훈동에 문을 연 <카카듀>에서 시작되었다고 서술했다.
그러나 이번 조사 결과 <후타미>의 개업 시기는 1923년이 아니라 1926년 8월22일이었고, <카카듀>의 창업도 1927년이 아니라 1928년 9월초였다. 또 노다객 이헌구는 <후타미>가 이른바 ‘순끽다점’이었다고 단정했지만 근거는 희박했다. <후타미>가 과자와 식사, 그리고 주류까지 판매했다는 광고문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과자점이나 식당, 주점에 병설된 끽다점은 <후타미> 이전에도 다수 존재했다. 과자점을 겸했던 <쇼카코오키나(1921)>와 <다리야(1917)>가 <후타미>보다 5-6년 전에 개업했고, 식사 제공을 했던 끽다점으로는 <탑동 카페(1914)>와 <청향다원(1910)>, <남대문역 끽다점(1909)>과 <청향원(1900)>, <홍릉앞 끽다점(1899)> 등이 존재했었다.
식사와 스낵 뿐 아니라 숙박과 함께 커피와 차를 제공한 호텔도 있었다. <조선호텔(1924)>과 <손탁호텔(1902)>, <대불호텔(1888)>이 그것이다. <손탁호텔>과 동시대에 정동 인근에서 영업했던 임페이얼호텔(1903년 이전)과 팔레호텔(1901년), 스테이션호텔(1901년)과 서울호텔(1898년)도 끽다 서비스를 제공했을 가능성이 있고, <대불호텔>과 동시대의 <스튜어드호텔(1888)>과 <꼬레호텔(1890)>에서도 서양인 고객들에게 커피와 차를 판매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본다면 조선의 끽다문화의 시작을 1923년의 <후타미>와 1927년의 <카카듀>로 규정한 노다객 이헌구는, ‘경성 다방의 역사’에서 첫 40년을 생략해 버린 셈이다.
노다객 이헌구는 어째서 이 같은 실수를 한 것일까? 그 이유는 “경성 다방 성쇠기”의 첫 부분에 제시되어 있다. 그는 “서울서 맨 처음 우리가 다점(茶店)이라고 드나든 곳”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한 것이다. 즉, 그는 ‘경성 다방의 성쇠사(史)’를 서술한다고 했지만 그 역사는 ‘우리들,’ 즉 이헌구와 그의 동료들이 경험했던 다방들을 중심으로 삼은 ‘주관적 역사’였던 것이다.
<조선호텔(1914)>의 로비 라운지나 <팜코트 썬룸(1924)>은 이들이 편하게 앉아 커피를 마시며 음악을 듣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곳이 아니었을 것이다. 커피와 찻값이 비싸기도 했지만, 그런 곳에서는 “벽화”나 “금붕어”처럼 오래 머물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노다객 이헌구의 경성 다방사에서 호텔들이 제외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남대문역 끽다점(1909)>이나 <경성역 티룸(1925)>은 왜 생략되었을까? 일본 유학 경험이 있는 그들은 경성역을 이용해야 했고, 거기에 끽다점과 티룸이 있는 것을 몰랐을 리 없다. 게다가 노다객 이헌구의 동료인 이상과 박태원도 작품 속에서 경성역의 끽다점과 티룸을 묘사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헌구와 그의 동료들에게는 <남대문역 끽다점>과 <경성역 티룸>도 호텔의 끽다점들과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그곳은 사람들이 시계바늘에 맞춰 움직이는 곳이지, 시간을 붙들어 매고 음악과 대화를 즐길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이상과 박태원이 그곳을 형상화했을 때에도 언제나 ‘혼자서’ 방문했던 곳으로 묘사되고 있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요컨대, 노다객 이헌구의 “경성 다방 성쇠기”는 1920년대와 1930년대 서울의 다방에 대한 객관적 역사가 아니었던 것 같다. 따라서 그들이 경험하지 않은 끽다점들은 생략될 수 밖에 없었다. “경성 다방 성쇠기”는 이헌구와 그의 문화예술계 동료들이 집단적으로 공유했던 주관적 문화사였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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