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다객 이헌구의 “경성 다방 성쇠기”가 “다방문화의 개척자들”이 공유한 다방 경험을 써내려간 주관적 문화사라면, 그 내용은 시대적, 지리적, 문화적 조건 속에 한정될 수밖에 없다.
우선, 이 “다방문화의 개척자들”은 대체로 1900년대 중반에서 1910년대 초반에 걸쳐 태어난 사람들이다. 이들은 1920년대 중반에야 청년기에 도달했으므로, 그 이전의 끽다점과 끽다문화를 경험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들이 <손탁호텔>이나 정동의 다른 호텔에서 커피나 홍차를 마셔보지 못한 것은, 그때 그들이 아직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선호텔>의 초기 끽다 서비스를 누려보지 못한 것도 그들이 아직 십대이거나 그보다 더 어린 청소년이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이유로 더 이전의 끽다점들, 즉 <홍릉앞 끽다점(1889)>이나 <청향원(1900)>, <남대문역 끽다점(1909)>이나 <청향다원(1910)>, <탑다원(1914)> 등을 이들이 경험해 볼 수 없었고, 따라서 노다객 이헌구의 “경성 다방 성쇠기”에 포함될 수 없었다.
둘째, 초기 다방문화의 개척자들이 대체로 경성에 거주했다는 사실도 무시할 수 없다. 이들이 인천의 <대불호텔(1888)>이나 <스튜어드호텔(1888)>, 혹은 <꼬레호텔(1890)>을 경험하기 어려웠던 것은, 그들이 태어나기 전에 개업된 호텔들이기도 했지만, 설사 그 호텔들이 오래 유지되었거나 다른 끽다점들이 생겼더라도 이들이 인천까지 자주 여행할 용의는 없었을 것이다.
이들이 끽다문화를 향유한 것은 경성에서도 좁은 지역, 즉 <카카듀(1928)>와 <멕시코(1929)>와 <제비(1933)>가 있었던 종로와, <후타미>와 <금강산>과 <명치제과> 등이 있었던 충무로에 한정되어 있었다.
“경성 다방 성쇠기”는 또 하나의 지리적 배경을 안고 있었다. 도쿄였다. <청색지> 동인의 절반이 일본 유학을 경험했고, 해외문학파의 거의 전부가 일본 유학생 출신이었다. 그들이 유학했던 도시는 십중팔구 도쿄였다.
이들은 도쿄 시절에 끽다경험을 습득한 이들이 ‘근대적’이고 ‘선진적’으로 보이는 그 문화습관을 이어나가려 한 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었다. 따라서 이들의 도쿄에서 자신들이 즐기던 분위기의 끽다점을 선호했으리라는 것은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후타미>가 “도쿄식 끽다점”을 표방한 것도 그런 의도가 깔려 있었을 것이다.
셋째 “경성 다방 성쇠사”는 1920년대말과 1930년대 초의 도쿄와 경성이라는 시공이 연결되면서도 뒤틀리는 문화적 맥락을 반영할 수 밖에 없었다. 카페 문화와 끽다점 문화가 그것이다.
일본에서는 1910년대에 끽다점이 먼저 시작되고, 1920년대에 주류와 여급 서비스가 부가된 카페가 생겼다. 일본의 ‘카페’는 서양의 카페와 그 함의가 달랐다. 그것은 서양의 카페 개념에 알콜과 에로 서비스를 가미해 이뤄진 일본 독특의 문화였다.
그런데 경성에서는 1920년대 일본으로부터 카페 문화가 먼저 들어와 번성했고, 끽다점 문화는 1920년대 후반에 가서야 뒤늦게 도입되어 자리 잡기 시작했다. 도쿄와 경성의 두 도시에서 카페와 끽다점은 모두 ‘넌센스’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강조점은 달랐다. 카페는 ‘에로(틱)’라는 평가였고 끽다점은 ‘그로(테스크)’라는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에로의 카페와 그로의 끽다점은 둘 다 사회적 용인 범위 안에 있었지만 끽다 문화를 ‘직업없는 젊은이들의 비생산적인 소일거리’로 비난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끽다객들은 끽다점을 시대적 고뇌를 털어놓고 창작의 계기를 마련하는 아지트로 활용하곤 했다. 노다객 이헌구가 “경성 다방 성쇠기”에서 전달하려고 했던 메시지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경성의 카페문화와 끽다점 문화의 생명은 그다지 길지 못했다. 이헌구의 “경성 다방 성쇠기”가 출판된 지 석달 후인 1938년 7월 중일 전쟁이 발발하고 이것이 1941년의 태평양 전쟁으로까지 이어지면서 경성의 카페와 끽다점들은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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