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 다방 성쇠기”의 저자 노다객이 “다방 보헤미안의 수기”의 저자 이헌구와 동일 인물임을 짐작하게 하는 또 다른 문헌 방증도 있다. 우선 노다객이 <카카듀>를 서술한 것을 읽어 보면 그가 이 끽다점에 대해 시시콜콜한 사항까지 잘 알고 있었음을 느낄 수 있다.
“조선사람 손으로 조선인 가(街)에 맨 처음 났던 다방은 9년 전 관훈동 초(初) 3층 벽돌집(현재는 식당 기타가 되어 있다.) 아래층 일우(一偶=한 구석)에 이경손씨가 포왜(布哇=하와이)에선가 온 묘령 여인과 더불어 경영하던 ‘카카듀’다.
“이 집은 이씨의 떼카(데카당스의 줄임말=퇴폐적) 취미를 반영하야 촛불을 켜고 인도 모직마포 ‘테이블 크로스’에다 조선가면을 걸어 놓고 간판 대신에 붉은 칠한 바가지 세 쪽을 달아 놓아 한때 경성 가두에 이채를 발하였다.”
이 한 문단에 <카카듀>의 (1) 개업시기(9년 전), (2) 위치(관훈동 초입), (3) 건물(3층 벽돌집), (4) 경영자(이경손과 하와이 출신의 묘령 여인), (5) 조명(촛불), (6) 내부 장식(모직마포 테이블보와 조선 가면), (7) 간판(붉은 바가지 세 쪽) 등이 빼곡히 서술되어 있다.
“경성 다방 성쇠기”에 언급된 23개 다방 중에서 이만큼 자세하게 서술된 것은 없었다. 22개의 다방이 서술된 “다방 보헤미안의 수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저자가 <카카듀>를 매우 잘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친근감이나 애착심까지도 갖고 있었다는 뜻이다.
한편 1969년 8월19일의 <대한일보>에 실린 연재물 <문단교유기>에는 “나와 해외문학 시대”라는 이하윤의 기고문이 실렸는데, 이 글에도 <카카듀>에 대한 다음과 같은 서술이 나온다.
“그 무렵(=1928년 여름)에 북촌에는 다방이 하나도 없다가 안국동 네거리 가까운 관훈동의 돌집 아래층에 <까카듀>라는 이름의 끽다실(喫茶室)이 신장개업을 했는데 이선근의 아이디어가 많이 반영되었을 뿐더러 정인섭의 탈(가면)을 비롯한 실내의 장치와 조명이 주효하여 김진섭의 명명(命名)으로 <까카듀>는 문을 열게 된 것이다. 마담은 상해에서 돌아온 현여사, 영화감독 이경손이 턱시도를 입고 차를 나르기도 했다.
“신문기자와 예술가들이 들러 가는, 아직도 상업화되지 않은 휴식처의 구실밖엔 못하던 오아시스, 여기가 우리 '해외문학' 동인들의 공적 집회소이기도 하였다. 밤 시간에는 가끔 촛불 밑에서 우리들만의 조용한 파티를 열고 즈불로브카로 젊은 기분을 돋우었다.” (이하윤, <연인>, 통권 30호, 2016년 여름, 132-158쪽.)
<카카듀>에 대한 이하윤의 회상도 상당히 구체적이다. 이 글은 <카카듀>가 개업한지 거의 40년 후에 쓴 회고문이지만 그 내용은 노다객 이헌구의 회상만큼이나 자세하다. 물론 이하윤의 서술에는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나 오류도 포함되어 있지만, 그 점은 나중에 다시 보기로 하고, 지금은 그의 회상이 노다객 이헌구의 회상과 내용상 얼마나 겹치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대략의 비교만으로도 두 사람의 회상은 <카카듀>의 (1)개업 시기, (2)위치, (3)건물, (4)주인, (5)조명, (6)장식(탈) 등에 대해 내용이 일치함을 알 수 있다. 노다객이 언급했으나 이하윤이 누락한 것은 ‘마포 테이블 클로스’와 ‘간판을 대신했던 붉은 박 세 개’뿐이다. 30년의 터울을 둔 두 회상이 이만큼 일치한 것은 그들이 함께 <카카듀>를 경험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이하윤과 이헌구는 해외문학파 동인이다. 해외문학파의 전신 외국문학연구회는 1926년 가을 도쿄에서 7명의 동인으로 결성되었고 1927년 초 <해외문학> 창간호를 발간했다. <해외문학> 2호를 낼 즈음 8명의 회원이 더 가입했는데, 이때 이헌구가 해외문학파 동인이 되었다.
이들은 유학을 마치고 속속 귀국해서 1928년 여름 <카카듀>를 아지트 삼아 동인지 발간과 문학 행사를 벌이기 시작했다. 1928년 9월13일의 <동아일보>에는 해외문학파의 젊은 문인들이 <카카듀>에서 톨스토이 탄생 1백주년을 기념하는 문학 모임을 열었다는 소식도 보도되었다.
즉, 이하윤과 노다객이 <카카듀>에 대해 거의 같은 회상을 한 것은 그들이 같은 시기에 <카카듀>에서 함께 활동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을 고려할 때 “경성 다방 성쇠기”의 저자 노다객이 해외문학파의 동인 이헌구와 동일인물이라고 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론일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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