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59월 최승희는 홋카이도 순회공연을 단행했다. 그해 5월 이시이무용단에서 독립해 독자적인 최승희무용단을 설립한 후 가졌던 첫 번째 홋카이도 공연이었다.

 

일주일 동안 삿포로(札幌, 922)와 오타루(小樽, 23), 나요로(名寄, 25)와 쿠시로(釧路, 27), 아사히카와(旭川, 28)와 하코다테(函館, 29)를 순회했던 강행군이었다. 삿포로에서 열린 첫 공연에 대해 920일의 <홋카이타임스(北海タイムス)>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1935년 9월20일의 <홋카이타임스(北海タイムス)> 8면에는 최승희의 삿포로 공연 기사가 실렸다. 이 공연의 수익금은 올림픽 스키 선수단 파견기금으로 기부된다고 발표되었다.

 

조선이 낳은 미인 무용가 최승희 부인이 이끄는 무용단의 공연이 22일 삿포로 공회당에서 개최된다. 이시이 바쿠 문하에서 그 천재성을 구가하다가 향토 조선에 돌아가 때를 기다리면서 수년간 조선의 고전 무용을 연구하여 창작한 신작으로 도쿄 무용계에 나타나 절찬을 받아온 여사에게 이 공연은 갱생의 첫 걸음을 장식하는 공연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일행은 약 십 명으로 이시이 미에코(石井美笑子)의 찬조출연이 있다. 주최는 최승희 후원회이고, 공연 수익은 스키 선수 파견 기금으로 충당된다. (사진은 최승희씨)”

 

맨 마지막의 공연 수익은 스키선수 파견 기금으로 충당된다는 말이 호기심을 자극했다. 무슨 스포츠 대회가 있었던 것일까? 삿포로 공연 이후의 스포츠 행사를 일일이 찾아보니 그로부터 5개월 후인 193626일부터 독일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Garmisch-Partenkirchen)에서 동계 올림픽이 개최됐다. 베를린 올림픽과 함께 동계올림픽까지 독일이 개최한 것이다.

 

근대 (하계) 올림픽이 1896(그리스)에 시작된 것과는 달리 동계 올림픽은 1924년 프랑스 샤모니(Chamonix)에서 처음 열렸다. 5회 대회까지는 하계올림픽 개최국이 동계올림픽도 함께 유치했는데, 1940년의 5회 동계올림픽 개최국은 도쿄 올림픽 개최에 성공한 일본이었다. 개최 도시는 홋카이도의 삿포로로 정해졌다.

 

삿포로 동계 올림픽의 직전 대회라는 점에서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동계 올림픽에 대한 일본인들의 관심이 높았지만, 문제는 일본 정부나 올림픽 조직위원회, 혹은 체육회 등이 올림픽 출전선수들의 경비를 지원하지 않았던 것 같다. 따라서 이를 일반 모금으로 충당했는데, 이에 호응하여 최승희도 삿포로 공연 수익금을 올림픽 스키선수단 경비에 보탠 것이었다.

 

일본은 이 동계 올림픽에 35명의 선수단을 파견했다. 단장 등의 임원이 4, 선수가 31명이었는데, 그중 스키선수는 10명이었다. 최승희의 파견기금 혜택을 입은 열 명의 스키선수들은 아오모리 출신이 2, 사할린 출신이 1명이었고, 나머지 7명이 홋카이도 출신이었다.

 

삿포로시 공회당

 

최승희가 공연했던 삿포로시 공회당은 15백석 규모로 특등석 입장료가 3, 1등석이 2, 2등석이 150전이었다. 최승희의 당시 인기로 보아 공연은 만석이었을 것이므로 1회 공연 수입은 대략 3천엔, 수익은 약 2천엔에 달했을 것이다. 이는 오늘날의 약 25백만원(금값기준)에서 6천만원(임금기준)에 해당하므로, 스키선수 10명의 참가 경비(배삯)는 충분했을 것이다.

 

선수들의 올림픽 성적은 그리 좋지 않았다. 메달권에 든 선수는 없었고, 가장 좋은 기록을 낸 선수가 졈프 종목에서 7위를 차지했던 이쿠로 쇼지(伊黒正次, 1913-2000)였고, 그밖에는 종목별로 10위권에 든 선수도 없었다.

 

최승희가 어째서 삿포로 공연 수익금을 스키선수단에 기부했는지 의아했다. 홋카이도 출신의 스키선수 7명 중에서 삿포로 출신은 1, 아사히카와 출신도 1명이었지만, 오타루 출신은 5명이나 되었다. 오타루 공연 수익금을 기부했더라면 더 열렬한 칭송을 받았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공연 수익금을 올림픽 선수단에 기탁한 것은 삿포로 공연뿐이었다.

 

한편, 독일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동계 올림픽에는 조선인 선수도 3명이 참가했다. 스피드 스케이트의 장우식(張祐植, 1914-1971), 김정연(金正淵, 1910-1992), 이성덕(李聖德, 1912-1968)이 그들이다. 모두 평안도 출신인 이들이 전일본의 국가대표 선수권을 따낸 것은 대단한 일이었지만, 이들의 올림픽 성적은 모두 10위권 바깥이어서 메달권에 들지는 못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