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 재일조선학생 중앙예술경연대회를 참관하고 나는 조선학교 무용부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무용부를 운영하는 조선학교가 얼마나 되는지, 무용부 학생들은 몇 명이나 되는지, 어떻게 연습하고 훈련받는지, 작품은 어떻게 창작되고 공연되는지, 등등이 모두 궁금했다.
오사카에 머물렀던 5일 동안 정세화 선생은 내 의문의 상당부분을 풀어주셨다. 정세화 선생도 내 최승희 연구에 대해 여러 가지를 물으셨는데, 그동안의 국내 조사와 유럽 조사, 그리고 그때까지의 일본 조사에서 드러난 사실을 성심껏 말씀드렸다.
그러다가 우리는 의기투합했고 약속을 하나 했다. 서로 돕자는 약속이었다. 정세화 선생은 나의 최승희 조사연구를 돕겠다고 하셨고, 나는 재일 조선학교를 도울 방법을 모색하기로 했다.
이듬해(2020년) 1월초, 내가 다시 고베를 방문했을 때부터 정세화 선생은 당장 약속을 지키기 시작하셨다. 재일 조선무용가들을 소개해 주셨고, 내가 그분들을 만나 인터뷰할 수 있게 주선해 주셨다. 덕분에 내 조사에는 80년 전의 최승희 공연 발굴뿐 아니라 현역 조선무용가들의 생생한 말씀도 들을 수 있게 됐다. 진짜 고마운 일이었다.
문제는 내가 어떻게 내 약속을 지킬 것인가, 였다. 내가 조선학교를 도울 방법은 거의 없어보였다. 거액의 재산가거나 잘나가는 사업가는 아니므로 내가 재력으로 도울 수는 없었다. 그저 은퇴한 연구자에 불과하므로 연구주제와 관련된 일일 수밖에 없었다.
정세화 선생과 의논을 거듭하던 중 한 가지 방안을 생각해 냈다. 고베조고 무용부 학생들에게 무용신을 선물하자는 것이었다. 대단한 선물은 아니라 해도 의미있는 선물은 될 것 같았다. 마침 3월1일이 고베조고의 졸업식이라고 하니, 그 시기에 맞춰 학생들에게 연습과 공연에 필요한 무용신을 한 켤레씩 선물하기로 했다.
당연히 정세화 선생의 도움이 필요했다. 무용부 학생 수와 각 학생의 무용신 치수를 알아내야 했기 때문이다. 정세화 선생은 고베조고에 연락해서 내 뜻을 전해 주셨고 승낙을 받으셨다. 교장선생님과 무용부 교사의 협조아래 학생들의 이름과 신발치수가 파악되었다. 지도교사 2분을 포함해서 필요한 무용신의 수는 28켤레였다.
서울에 돌아온 나는 <무용신 모금> 캠페인을 시작했다. 한국 돈으로 70만원쯤 모금하면 비용을 충당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부러 1인1만원의 후원을 요청했다. 액수를 채우는데 급급하기보다는 후원자 수가 더 중요한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57명의 후원자가 94만원의 성금을 모아주셨다. 예산이 넉넉해졌으므로 마침 연락이 된 시코쿠조선초중급학교에도 무용신을 보낼 수 있었다.
무용신 모금 캠페인에 이인형 선생이 적극 참여했고, 결국 우리 두 사람은 무용신을 전달하러 2월27일에 마츠야마, 3월1일에 고베를 방문했다. 무용신을 받아든 학생들은 뜻밖의 선물에 기뻐했고, 지나치게 좋아하는 학생들을 보면서 우리는 약소한 선물에 쑥스러우면서도 덩달아 기분이 좋았다.
무용신 전달을 끝내고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정세화 선생은 다시 한번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말씀을 하셨다. 두 번째 말씀을 꺼내시는 것을 보니 중요하다는 뜻이었다. 나는 주의를 기울여 경청했다.
1백 년 전 다카라즈카 인근 토목공사에서 사고로 희생된 조선인 노동자 5분이 계신데, 그분들의 영령을 기리기 위해 3월26일에 새로 추모비를 제막한다는 말씀이셨다. 다카라즈카의 시민단체와 재일동포들이 함께 추진하는 행사라고도 하셨다. 그리고 이런 말씀을 덧붙이셨다.
“이 지역 시민들이 조선인 희생자 세 분을 위해 1백 년 동안 제사를 지내오셨습니다. 다른 두 분도 일본시민들과 재일동포들이 20년 이상 연례 추도제로 모셔오고 있습니다.”
그 말씀을 들으면서 나는 1백년 동안 제사를 받으신 분들과 1백년 동안 제사를 지내신 분들이 동시에 궁금해졌다. 1백년전에 무연고자로 분류되신 이 조선인 희생자들은 과연 누구였던가? 일면식도 없는 그들을 그토록 오랫동안 제사 지내온 일본인들은 대체 어떤 분들이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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