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도 도미오 선생의 <무쿠게통신(300호)> 기고문에는 그가 정홍영 선생과 함께 답사했던 사적지가 나열돼 있었다. 두 사람의 협력과 공동연구의 성격을 짐작해 보기 위해 그 사적지들을 조사해 보았다. 특히 마츠시로(松代) 대본영과 고요엔(甲陽園)의 지하호가 내 주목을 끌었다.
마츠시로 대본영은 나가노현 산간지역에 설치된 대규모 지하 벙커이다. 패색이 짙어진 일제 군부가 본토결전을 위해 일왕가족과 군 지휘부(죠잔象山), 정부 기관과 NHK 방송국(마이즈루산舞鶴山), 그리고 이들을 먹일 식량 창고(미나가미산皆神山)를 수용하려고 만든 땅굴이었다.
1944년 11월11일부터 산간 암반지역의 지하를 파들어 간 이 지하호는 폭 4미터, 높이 2.7미터, 총 연장 13킬로미터로 계획되었다. 대형 덤프트럭 2대가 마주 달릴 수 있는 크기였으며, 일본 패전으로 중단될 때까지 9개월간 거의 10킬로미터가 완공되어 75%의 진척율을 보였다.
태평양 전쟁 전 7.8킬로미터의 단나(丹那)터널 공사에 16년(1918-1934)이 걸렸고, 전쟁 이후 약 14킬로미터의 호쿠리쿠(北陸)터널을 완공하는 데에 4년 반(1957-1962)이 걸렸던 것에 비교하면, 마츠시로의 지하호 공사가 얼마나 상식 밖의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는지 알 수 있다.
지하호의 규모와 공사 속도를 생각하면 이를 건설한 노동자들이 얼마나 큰 희생을 치렀는지 짐작하기도 어렵지 않다. 기록과 증언에 따르면 마츠시로 지하호 공사에 동원된 조선인 노동자는 6-7천여 명, 그중 2천명은 조선에서 강제 동원되었다. 공사에 동원된 일본인 노동자가 1천5백-3천 명이었다고 하니, 마츠시로 지하호는 조선인에 의해 건설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특히 위험도가 높은 암반 굴착공사는 거의 조선인이 담당했으므로 사상자가 자주 발생했는데, 증언에 따르면 조선인 사망자는 적어도 3백 명, 많게는 1천명에 달했을 것으로 추산되었다.
피해는 지하호 건설 중의 사망자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마츠시로 지하호 완공에 필요한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일본 군부는 오키나와 결사항전을 명령했고, 수백차례의 미군 공습을 감내했고, 결국 2발의 원자폭탄을 맞아야 했다.
1945년 3월9일 자정부터 5시간동안 계속된 도쿄대공습의 민간인 사망자는 최소 10만명(최대 19만명)으로 추산되었는데, 그중 적어도 1만 명이 조선인이었다. 1945년 4월1일부터 83일간 벌어진 오키나와 전투에서도 일본군 11만명, 민간인 12만명이 사망했고, 강제 동원된 조선인 군인, 군속, 노무자, 정신대원 중에서도 1만 명이 사망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사망자는 각각 16만6천명과 8만명으로 추산되었는데, 이중 조선인 사망자가 1만 명 이상이었다.
요컨대 마츠시로 지하호를 건설하느라 강제동원한 조선인 노동자 중에서 1천명의 사망자가 나온 것도 끔찍한 일이지만, 그 대본영 완공의 시간을 벌기 위해 3만여 명의 재일 조선인을 포함해 40만 이상의 일본인 민간인이 희생되었던 것이다.
희생은 사망자에게만 국한되지 않았다. 증언에 따르면 조선인 노동자들은 상시적인 과로와 영양실조에 시달렸다고 한다. 하루 12시간의 장시간 노동과 배고픔을 못 이겨 도망하다가 사살되거나 잡혀서 고문당한 사례도 보고되었다. 동굴 벽에는 조선인 노동자들이 고향을 그리며 쓴 “대구”와 “밀양,” 부모님을 생각하며 쓴 “구운몽”과 “세배”라는 문구들이 발견되었다.
패전과 함께 일제 군부가 기록을 소각하고 입구를 폐쇄했기 때문에 마츠시로 대본영의 존재는 오랫동안 잊혔다가, 이 지하호가 보호하려던 쇼와 천황(1901-1989)이 사망한 직후인 1990년에야 부분 개방되었다. 일제 군부와 정부가 천황제 존속과 그의 체면 유지를 위해 쏟는 노력은 일반 상식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일본 중앙정부와 지방정부는 지금도 노동자의 희생을 축소하거나 부정한다. 나가노시가 지하호 입구에 세운 안내문은 이 땅굴이 “강제 동원된 일본인과 조선인”에 의해 건설되었다고 서술하면서도 “모두 강제적인 것은 아니었다는 등 여러 견해가 있다”는 변명을 덧붙여 놓았다.
곤도 도미오 선생은 기고문에서 “마츠시로 대본영에 대해서도 정홍영 선생에게서 배웠고, 그곳에는 중학교의 수학여행으로 학생들을 데리고 2번이나 함께 갔다.”고 서술했다. 곤도 선생께 수학여행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시기를 요청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첫 번째 수학여행은 1989년 5월이었습니다. 당시 다카라즈카 시립중학교 3학년생들의 수학여행이었지요. 5월18일부터 5일간의 일정이었는데, 그중에서 마츠시로 대본영 지하호 방문은 5월20일이었습니다. 참가 학생은 3학년 6개 반이었으니까 약 2백-2백40명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그 수학여행의 사전답사를 위해 서너 명의 동료 교원들과 함께 한 달쯤 전인 4월4일에 마츠시로 대본영을 방문했습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그 지하호에 들어가 본 것입니다. 터널 안에서는 눈을 뜨고 있어도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만큼 깜깜했습니다. 그래서 손전등을 들고도 서로 길을 잃기 않기 위해서 기다란 줄을 잡고 다녀야 했습니다.
“두 번째 수학여행은 1992년 5월이었는데, 이때는 나가노시가 지하호를 정비하고 관리하기 시작한 직후였습니다. 지하호의 내부에 전등이 가설되어 관람하기는 편리해졌지만 제한구역이 설치되어서 관람할 수 있는 범위가 극히 한정되었습니다. 손전등을 준비하거나 줄을 잡고 다닐 필요는 없었지만 지하호를 방문한 의미나 감회가 줄어들었던 것 같습니다.”
곤도 선생이 대본영 지하호 건설과정에서 벌어진 노동자들의 참혹상을 제대로 인식한 것은 1994년 정홍영 선생과 함께 마츠시로에서 열린 <제5회 조선인 중국인 강제연행 강제노동을 생각하는 전국교류집회>에 참가했을 때였을 것이다.
이 전국교류집회는 이미 1990년 아이치현의 나고야(제1회, 8월25-26일), 1991년 효고현의 니시노미야와 고베(7월27-28일), 1992년 히로시마현의 구레(7월25-26일), 1993년 나라현의 시기산 교쿠조인(信貴山玉蔵院, 7월31일-8월1일) 등에서 열린 바 있었다. 이는 일본 전역의 뜻있는 역사연구자들이 모여서 일제 식민지 시절과 태평양 전쟁 시기에 재일 조선인과 중국인들이 겪어야 했던 강제연행과 강제노동에 관한 조사연구를 발표하는 연례행사였다.
이 전국교류집회는 전쟁범죄와 반인권행위를 부정하거나 은폐하려는 일본 정부를 반박하는 데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예컨대 1993년의 제3회 나라현 집회에서는 이른바 <후생성 명부>를 공개해 일본정부로서도 강제연행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결국 일본 역사 교과서에 ‘강제연행과 위안부’에 관한 기술을 포함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마츠시로에서 열렸던 제5회 집회에서도 “다수의 조선인 노동자를 혹사하고 본토결전의 최후의 보루로 만들어진 마츠시로 대본영은 실로 일본이 감행한 강제연행, 강제노동의 상징적 존재”라고 규정하고, “사실을 부정하여온 일본 정부도 시민들에 의하여 밝혀진 사실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고 선언했다.
마츠시로의 전국교류집회 이후에도 오사카부 다카츠키(高槻), 기후현 기후(岐阜), 시마네현 마츠에(松江), 이시카와현 카나자와(金沢) 등지에서 연례모임이 계속되었으나, 1999년 큐슈의 구마모토(熊本)에서 열린 제10회 집회를 마지막으로 연례집회는 종료되었다. 이후에는 각 지역 연구자들이 다른 연구자들을 초청해 그 지역의 연구를 보고하는 집회를 이어가고 있다.
<효고현 조선사연구회>의 히다 유이치(飛田雄一) 선생은 <무쿠게통신(178호)>에 실은 기고문에서 “정홍영 선생이 <조선인, 중국인 강제연행, 강제노동을 생각하는 전국교류집회>의 제안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밝혔다.
전국교류집회의 주창자 정홍영 선생과 함께 모든 집회에 빠짐없이 참가했던 곤도 선생은 조선인 강제연행과 강제노동의 실상을 가장 사실적으로 인식한 일본 지식인의 한사람이었다. 그같은 인식은 결국 자신의 고장 다카라즈카와 효고현에서 벌어졌던 유사한 일에 대해 자세히 연구하고 기록하는 일에 매진하게 했을 것이다.
곤도 선생이 주도한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의 건립도 정홍영 선생과 함께 다듬은 역사 인식과 시민단체 활동의 구체적인 결과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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