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곤도 도미오 선생이 2020년 5월31일자 <무쿠게통신(300호)>에 게재하신 기고문을 번역한 것이다. <무쿠게통신>은 한국/조선을 연구하는 일본인 중심의 모임인 <무궁화회>의 월간 기관지이다.)


정홍영 씨와의 일

곤도 도미오

 

1983년 가을의 어느 날 방과 후에 A중학교 직원연수회가 열렸다. 강사는 정홍영 선생으로 같은 교육구 내에 사시는 재일 코리안 지역사 연구가이다. 그해 여름, 무코 강이 범람해 정홍영 선생이 살던 지역이 거의 전역, 1층의 천장 근처까지 물에 잠겼다. 이 지역은 재일 코리안들이 밀집해 사는 곳이었는데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1961년 여름, 무코강 하천 부지에는 공습 이재민이나 생활 곤궁자 등 많은 사람이 거주하고 있었다. 당연히 그곳에는 다른 거주지를 찾기 어려운 코리아인들도 많았다. 현에서는 1958년부터 퇴거 권고를 반복하다가 19614월에는 아마가사키(尼崎), 니시노미야(西宮), 이타미(伊丹), 다카라즈카(宝塚)시 등에 걸쳐 무코강 하천 부지 거주자에게 퇴거 및 건물제거 명령을 내렸다. 불법 점거, 홍수의 위험성, 도쿄 올림픽을 위한 미관 정비가 이유였다. 이타미와 다카라즈카 시에서는 집단 이주지를 알선한 뒤에 철거를 진행했지만 아마가사키 시에서는 1961728일 한나절 만에 판자촌 철거를 강제 집행했다. 주민들에게 약간의 위로금이 지급되었을 뿐이었다.

 

2020년 5월31일자 <무쿠게통신(300호)에 실린 곤도 도미오 선생의 기고문 <정홍영 선생과의 일>.

 

이 때 다카라즈카시가 알선한 곳이 위의 땅이었다. 조사 결과 이 지역은 무코 강바닥보다 낮았다. 무코 강이 넘치면 반드시 물에 잠기는 곳이었던 것이다. 직원 연수회에서 정홍영씨가 인재라고 비난한 것도 당연했다. 다만 그의 말투는 지나칠 만큼 온화했고 확실한 사실을 조용히 제기했기 때문에 듣는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가졌다. 나는 그의 말투에 한 눈에 끌렸고, 모임이 끝나고 나서 연락처를 교환했다.

 

그 이후 나는 정홍영 선생의 금붕어 똥(金魚)”이 되었다.^^

 

정홍영 선생도 어디든 갈 때면 꼭 내게 연락을 주었다. 효고 조선관계 연구회의 일원으로 다카라즈카를 중심으로 지역 코리아인의 발자취도 조사해 왔지만, 특히 전국에 남겨진 일본 패전 시기의 공장 소개용 지하벙커에 대해서는 끈질기다고 할 만큼 자세히 조사했다. 이른바 마츠시로(松代) 대본영에 대해서도 정홍영 선생에게서 배웠고, 그곳에는 중학교의 수학여행으로 학생들을 데리고 2번이나 함께 갔다. 코요엔(甲陽園)의 지하호, 아이노(相野)의 지하호, 야마나카(山中) 온천의 지하호, 쿠쿠리()의 지하호에도 함께 갔다.

 

 

그러던 중 1993326일 아침, 무쿠게회의 호리우치 미노루(堀内稔) 선생이 전해주신 신문 기사 사본을 들고 정홍영 선생과 함께 차를 타고 타케다오(武田尾)로 향했다. 도중에 차를 세우고 근처의 찻집 겸 식당에 들어가 커피를 마시면서 기사 내용을 확인했다. 신문은 1929328일자 기사로, 옛 국철 후쿠치야마선 개량공사 중에 얼어붙은 다이너마이트를 모닥불에 말리다가 실수로 폭발시켜 주위에서 불을 쬐던 조선반도 출신 인부가 죽고 다쳤다는 사건을 전하고 있다.

 

그 순간 알게 된 것이지만, 우연히도 사고가 있던 날이 64년 전 326일 바로 그날이었다. 기사는 윤길문(尹吉文, 21)이 즉사하고, 오이근(呉伊根, 25)이 병원에 실려 가던 중 사망했으며, 윤일선(尹日善, 25)과 그의 부인 여시선(余時善, 19) 등이 중경상을 입었다고 보도했다. 장소는 카와베군 니시타니무라 키리하타 나가오산 제6호 터널 입구라고 되어 있었다.

뜻밖에도 제삿날에 현장을 방문하게 된 우리는 아무 제물도 준비하지 못한 채 마음뿐인 제사를 지냈다. 지금의 타케다오역에서 제6호 터널까지는 걸어서 약 20, 맑은 날이면 무코 강의 졸졸졸 흐르는 소리에 섞여 꾀꼬리 울음소리가 들리는, 걷기에 아주 기분 좋은 길이다.

 

짧은 터널을 두 개 빠져나가면 다카라즈카 시가 정비한 <벚꽃동산()> 입구이다. 이곳은 미즈카미 츠토무(水上勉)<사쿠라모리(櫻守)>로 유명해진 곳이기도 하다. 오른쪽에는 <신수이히로바(親水広場)>라고 이름 붙은 광장이 있는데, 이곳에 당시의 노무자 합숙소(飯場) 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었다.

 

 

무코 강이 크게 오른쪽으로 돌아나가는 곳에 이르면 6호 터널이 보이고 그 오른쪽으로는 무코 강을 건너는 녹색 철관도 보인다. 이 철관은 고베 시까지 식수를 운반하는 <고베 수도>가 지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상류에 만들어진 센가리 수원지에서 멀리 고베 시까지 대체로 어른 혼자 서서 걸을 수 있을 정도의 터널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이 도수관은 1910년대부터 끊임없이 물을 나르고 있는데, 사실 이 터널 굴착공사 중에도 김병순(金炳順, 30), 남익삼(南益三, 37), 장장수(張長守, 27) 등 세 명의 조선반도 출신의 인부가 사망했다는 사실이 구 니시타니무라 사무소의 매장 인허증을 통해 밝혀졌다.

 

매년 326일에는 거르지 않고 이곳을 찾아와서 6호 터널 근처에서 간단한 제사를 지내왔다. 처음에는 둘이서만 왔지만 때로는 많은 사람들을 불러서 함께 오기도 했다. 2000118일 정선생이 숨진 뒤에는 나 혼자서 간 적도 여러 번 있다. 정홍영 선생은 이 사실을 후세에 남기는 비석을 세우고 싶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하셨다.

 

 

정홍영 선생의 작품의 압권은 그의 저서 <가극의 거리의 또 다른 역사-다카라즈카와 조선인(歌劇のもうひとつの歴史宝塚朝鮮人, 1997)>이다. 다카라즈카 지역에 찍힌 코리아인의 발자국은 거의 다 이 책에 망라되어 있다. 이 책이 출판되었을 때에 어떻게든 좀 '대단한 곳'에서 출판기념회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런 화려한 곳은 좀...”이라며 주저하는 본인을 제쳐두고, 망설임 없이 <다카라즈카 호텔>을 기념회장으로 정했다. 지금도 당일의 참가자 명단을 보면 1백명의 이름을 읽을 수 있다.

 

올해 2020223일 아침, 정홍영 선생의 책에도 서술되지 않은 중대한 소식이 날아들었다. 니시타니의 타마세(玉瀬)에 있는 만후쿠지(萬福寺)에서 온 소식이다. 100년 이상 사찰과 지역 부인회에서 조선인들을 위령하고 있는데, 부인회도 고령화되고 인원수도 줄어들어 이제 그만 마무리를 지으려 한다는 말씀이었다. 다만 이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알고 싶다는 것이었다전화로 대략 방문 약속을 하고 26일에 절에 찾아가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만후쿠지(萬福寺)에서는 매년 824일 아침 무연고 참배를 계속해 왔다. 주지 스님과 부녀회원이 무연불(無縁仏)씨와 삼계만령(三界萬霊)에게 꽃을 바치고 쟁반 과자를 바치고 각각 향을 피우며 영혼을 위로해 왔다. 아마도 100년 정도 계승되어 오는 동안에 그 의미가 제대로 전해지지 않게 되었던 것 같다. 선대 주지 스님이 옛날 타케다오의 터널 폭파 공사로 사망한 조선인들을 추도하고 있다는 말씀이 계셨다고 한다.

 

 

그런 이야기를 나눈 후에 현장을 안내해 주시고, 꽃과 과자를 갖추어 불경을 외워 주셨다. 금년 326일에 다카라즈카의 조선인을 추도하는 비를 건립한다고 전하자, 지금까지 자신들이 계속해 온 위령의 마음을 이어 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면서 몹시 기뻐해 주셨다. 그리고 놀랍게도 추도비가 완성되는 날 아침 만후쿠지의 주지 내외분이 우리보다 일찍 현지를 찾아 추도비 앞에서 법요(法要)를 지내 주셨다.

 

그날, 완성된 비석을 둘러보고 돌아오는 길에 정홍영 선생의 묘에 가서 비석이 완성된 것을 보고했다. 대체로 항상 326일 타케다오에 갔다 오는 길에 묘소에 들르기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벌써 20회 정도는 참배를 했지만, 이날에야 비로소 새롭게 깨달은 것이 있었다. 늘 무덤의 앞에서 참배할 뿐이어서 몰랐는데 이날은 일행 중의 한 사람이 묘 주위를 둘러보다가 묘석 옆에 무언가 글씨가 쓰였는데 무슨 말인지 못 읽겠다는 것이었다. 내가 가서 읽어보니 한글로 통일을 바라면서 이곳에 묻음이라고 되어 있다.

<중국인과 조선인의 강제연행 강제노동을 생각하는 전국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마쓰에(松江)에 가는 길에 하쿠비(伯備)선 특급열차 박스석에서 정홍영씨가 통일되기 전까지는 고향인 한국에 가지 않겠다고 말했던 일이 지금도 마음에 남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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