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무용과 예능무용 사이에서
최승희가 새롭게 내면화한 <예술가 정체성>은 이내 도전에 직면했다. 한 가지 도전은 조선에서 날아왔다. 조선의 관행에 따르면 ‘춤’이란 기생의 할 일이었다. 최승희는 근대도시 도쿄에서 신무용에 정진하고 있었으나 경성의 조선인들의 눈에는 그저 기생의 일뿐이었다. 유학시절 최승희가 받은 모친의 편지가 그 점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여기(=경성) 사람들은 ‘최씨 가문의 살림이 곤란하게 된 끝에 소중한 딸을 기생으로 팔아 버린 것’이라는 말들을 하고 있단다. 그런 말들은 살을 베는 것처럼 나를 괴롭힌단다. 하지만 언젠가 사람들의 소문이 터무니없는 것임을 알게 될 날이 오겠지. 너는 꼭 훌륭한 무용가가 되어서 이 더러운 소문을 내는 사람들이 후회하도록 해주기 바란다.”
모친의 기대는 어그러지지 않았다. 최승희의 예술에 대한 이해는 깊어졌고 자신을 예술가로 동일시하는 수준은 대단히 높아졌다. 3년 반이 지나 무용수업이 끝나갈 무렵의 최승희의 눈에는 그의 스승 이시이 바쿠의 예술조차 정체된 것으로 보일 정도였다. 최승희의 오빠 최승일은 “무용을 시작한 지 3년이 지난 어느 날,나는 너에게서 이런 편지를 받은 것을 기억하고 있다”면서 <나의 자서전(1937)>에 이렇게 썼다.
“오빠, 저는 요사이 무용예술이란 어떤 것인가와 예술가의 양심이라는 것을 깨달아갑니다. 그것은 이런 데서 발견됩니다. 석정 선생님이 처음 독일에서 돌아와 야마다 코사쿠(山田殺作)씨의 반주로 안무된 작품과 요사이 만드는 작품의 차이가 왜 그다지도 정신과 감홍이 다릅니까? 저는 차차 석정 선생님에게 환멸을 느껴갑니다. 요사이 그의 예술에는 시가 없어요. 그것도 결코 무리는 아닙니다. 그는 춤을 추어서 수십 명의 식구를 먹여 살려야 합니다. 집이 없으니 집을 지어야 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제는 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요즘 제 마음은 마치 관솔불처럼 활활 타오릅니다.”
새로 접한 예술에의 열의에 사로잡힌 최승희의 관찰은 옳았을 것이다. 분주한 생활 속에서 이시이 바쿠 작품의 예술성은 저하되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최승희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이시이 바쿠의 예술성이 일시적으로나마 저하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였다.
1920년대 일본의 대중문화는 꽃피었다. 인쇄발달로 책과 잡지, 축음기의 발달로 노래와 음악이 발달하면서 통속화되기 시작했다. 이른바 다이쇼 데모크라시가 무르익고, 경제가 여유로워지는 가운데, 문화는 에로그로난센스의 통속화 경향이 짙어지기 시작했다. 무용도 예외가 아니었다. 예술무용의 시대가 가고 예능무용의 시대가 온 것이다.
예능무용은 1913년 다카라즈카 창가대의 발족으로 시작되었지만, 1919년 다카라즈카소녀가극단(寶塚少女歌劇団)이 결성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24년에는 다카라즈카 대극장이 완성되면서 쇼 비즈니스는 본격 궤도에 올랐고, 1927년에는 일본 최초의 레뷔(Revue)로 꼽히는 <몬파리(モン・パリ)>가 흥행에 성공하면서 예능무용은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1928년에는 쇼치쿠소녀가극단(松竹少女歌劇団)이 결성되어 다카라즈카소녀가극단과 함께 경쟁적으로 1930년대의 쇼 비즈니스를 주도했다. 예능무용이 성행할수록 예술무용은 위축되었고, 소녀가극단이 성행할수록 예술무용단의 흥행은 저조해졌다. 이시이 바쿠는 무용단을 유지하고 생활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수입을 유지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도쿄에서뿐 아니라 지방 공연을 늘려야 했고, 그럴수록 창작을 위한 시간과 열정은 줄어들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최승희는 조선 기생의 길을 피하며 예술의 길을 걸었으나, 예술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 무렵 예능의 거센 물결에 직면해야 했다. 그러나 1929년 당시만 해도 최승희는 이같은 대중문화계의 변화를 이해하지 못했고, 이를 단지 이시이 바쿠의 예술성이 시들고 있다고 판단해 무용 유학의 계약기간 만료를 기회로 이시이 바쿠의 문하를 떠나 조선으로 돌아왔다.
비록 현실성이 결여되어 있었다 하더라도, 이때의 최승희는 <조선인 정체성>과 함께 <예술가 정체성>으로 단단히 무장되어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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