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취적인 <신여성 정체성>

 

가족과 관객과 평론가들에 의해 벌거벗고 춤춘다고 요약된 신무용이 발전은커녕 제대로 전개되기도 어려웠으므로 이는 최승희의 공연 활동에 난관이었고 그의 창작활동을 위축시켰다.

 

193110월호 <삼천리>에서 최승희는 민요의 예술화를 추구하고 싶지만 재정이 없어 스튜디오 유지조차 어렵다고 고백했다. “그만치 명성이 높은 터에 7-8백원의 돈도 최승희양을 위해 던지는 분이 없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최승희는 대답했다. “있다면 있다고도 하겠지요. 그러나 그런 분들은 어디 예술무용을 잘 자래우기 위하여 주어야 말이지요. 그런 분들은 대개 딴 목적이 있대요. 저는 싫어요.” 딴 목적이란 <신여성 예술가>의 성적 대상화였다.

 

귀국 직후인 192911월 최승희는 고시정 19번지의 일본인의 저택을 빌어 첫 무용연구소를 설립했지만, 반년도 안 되어 19304월에 옥천동 65번지로, 19306월 필운동(번지 미상)으로, 19309월에는 적선동 195번지로, 19315월에는 서빙고로(정병호, 1995:59) 무용연구소를 옮겨야 했다.

 

1929년 11월28일의 <동아일보>에 실린 적선동 소재 무용연구소를 소개한 기사.

 

스승 이시이 바쿠가 1924년 무사시사카이에 무용연구소를 설립, 1928년 지유가오카로 확대 이전한 후 약 30년 동안 한 곳에서 신무용의 왕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것과는 달리, 경성의 최승희 무용연구소는 약 3년 동안 5군데나 옮겨 다녀야 했던 것이다.

 

최승희에게도 패트론을 자처한 부호들이 있었지만 재정지원의 댓가로 신여성 예술가 최승희를 애인이나 첩으로 삼고자 했고, 최승희는 그런 제안을 수락할 수 없었던 것이다.

 

자신과 자신의 예술에 대한 성적 대상화를 중단시키는 유일한 방법으로 최승희는 안막과의 결혼을 단행했다. 남편 안막은 최승희의 무용 활동을 재정으로 지원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미혼 신여성 무용가의 성적 대상화를 저지시켜 주었다.

 

안막과의 결혼 후에도 최승희는 무용가로서의 직업 활동을 중단하지 않았고, 딸 안승자의 출산 이후 남녀평등에 대한 확실한 견해를 갖게 되었다. 이는 또 1930년대 새로 대두된 현모양처라는 여성의 역할에 대한 저항이기도 했다. 가부장제의 남존여비와 여필종부가 설득력을 잃었지만 신여성의 사회활동과 자유연애도 역시 부정되는 가운데 제기된 현모양처의 역할은 가부장제가 신여성을 포섭하려는 어정쩡한 개념이었기 때문이다.

 

 

최승희와 딸 안승자. 최승희는 딸에게 '남자를 이기라'는 뜻의 이름을 직접 지어 주었다.

최승희는 결혼과 출산, 그리고 지속적인 무용 활동을 통해 그의 <신여성 정체성>을 독특하게 확립했음을 알 수 있다. 봉건적인 가부장제의 여필종부와 신여성의 자유연애를 모두 거부했고, 여성을 가정에 가두려는 현모양처 요구에도 머물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승희는 자신과 신무용을 성적 대상으로 이해하는 가부장제 관행도 거부했지만, 가부장제에 대항하는 수단으로 성적 방종을 채택한 자유주의적 신여성도 비판했다.

 

딸을 출산했을 때 최승희는 아들보다 낳은 딸이라는 뜻으로 승자(勝子)라는 이름을 지었는가 하면, 예술 활동을 중단해야할 경우 시부모를 모시는 평범한 여성으로 돌아갈 각오도 내비쳤다. 남녀평등, 나아가 여성우월의 태도는 전통적 여성상과 구별되었지만, 시부모를 모시는 며느리가 되려는 결심은 신여성과 매우 다른 태도였다.

 

최승희가 독특한 <신여성 정체성>을 갖게 된 것은 자신의 가부장들로부터 받았던 전폭적인 지원 덕분일 것이다. 부친 최준현은 딸인 최승희에게 신교육을 받을 수 있게 했고, 큰오빠 최승일은 최승희에게 신사상의 정신적 자양분을 주었을 뿐 아니라 그를 예술가의 길로 이끌어 주었다. 스승 이시이 바쿠는 남녀 차별과 민족 차별 없이 최승희를 예술가로 교육시켰고, 자유연애가 아니라 중매결혼을 통해 맺어진 남편 안막은 자신의 경력을 희생하면서 최승희의 무용 활동을 지원했다.

 

가부장들로부터 이같은 특별한 지원을 받은 최승희의 <신여성 정체성>은 가부장제에 대한 저항과 대결의식이 특징이었던 일반적 <신여성 정체성>과 달랐다. 최승희의 <신여성 정체성>은 가부장들의 지원에 힘입어 자신감과 진취성을 가졌던 것이 특징이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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