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신여성 정체성>: 선망과 경멸의 대상
유학을 끝낸 최승희는 1929년 8월 조선으로 돌아왔다. 18세의 어린 나이였지만 <조선인 정체성>과 <예술가 정체성>으로 무장되어 있었고 자신의 이름이 걸린 무용단을 설립한 최승희에게는 또 하나의 정체성 도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신여성 정체성>이었다.
조선의 신여성 현상은 1910년대에 여성교육운동에서 시작되어 1920년대 일제의 문화통치정책으로 조성된 자유주의적 분위기 속에서 시작된 여성의 사회 활동 참여로 활발해 지고 있었다. 신여성들은 신학문, 단발과 양장 등의 외양으로 나타난 신문화와 가부장제에 대항하는 남녀평등과 자유연애 등의 신사상으로 무장되어 있었다. 이들은 일본의 관행을 따라 흔히 모던걸이라고 불렸다.
새로운 능동적 주체를 지향한 신여성은 <신여자>, <신여성> 등 1920년대의 여성 잡지를 중심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펴는 한편, 학문과 교육, 문학과 예술 분야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선구적 신여성으로 김일엽, 김활란, 나혜석, 박인덕, 유각경, 허영숙 등이 꼽힌다. 최승희는 이들의 뒤를 이어 1920년대 말부터 신여성의 대열에 합류한 셈이다.
신여성은 젊은 세대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지만 기성세대에게는 사회질서를 위협하는 위험요소였다. ‘신여성’에 대한 반발은 부정적 낙인찍기로부터 시작되었다. 신여성은 (1) 허영과 사치에 물든 ‘반사회적’ 존재이자 (2) 육아와 가사 노동을 부정하는 ‘반가정적’ 존재로 묘사되었다. 전자는 신여성들이 단발과 양장, 하이힐과 화장품으로 대표되는 서구문물을 수용했기 때문이었고, 후자는 남녀평등을 주장하며 직업 활동에 뛰어드는 한편 자유연애와 연애결혼을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신여성에 대한 부정적 편견은 학문과 문필에 종사하는 신여성에게도 부여되었으나, 신여성 예술가, 특히 공연예술가들에게는 가혹했다. 여성 연극인과 영화배우, 무용가는 과거 봉건적 사회질서 속에서 기생과 재인 등 천민들이 담당했던 직종이었기 때문이었다.
최승희의 유학기간이었던 1920년대 후반 일본에서는 여학생이나 여성 예술가, 특히 여성 무용가에 대한 ‘낯선 눈길’은 거의 사라졌다. 일본의 개국(1858)과 메이지유신(1868)으로 신문명을 받아들인 지 이미 두 세대가 지났고, 여성교육과 신예술이 보편화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조선 사회는 신여성을 대하는 태도가 사뭇 부정적이었다. 개국과 근대화가 강제적이었던 만큼 반외세, 반일감정과 결합된 봉건적 가부장제의 저항이 심했기 때문이다. 특히 신여성의 자유연애와 연애결혼은 정조관념 부재와 성적 타락으로 강한 비난을 받았다.
이같은 사회분위기 속에서 여성 무용가는 ‘신여성’으로 범주화되어 젊은 세대와 일부 인텔리계층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지만 기성세대에게는 비난의 대상이었다. 젊은 세대의 선망은 무용 활동에 별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기성세대의 비난은 큰 방해가 되었다.
유학시절 ‘딸을 기생으로 팔아먹었다’는 비난을 견디며 ‘훌륭한 무용가가 되어 돌아오라’는 편지를 보낼 만큼 인식의 변화를 보였던 최승희의 모친조차 정작 최승희의 경성 공연을 관람하고 “무대에서 내가 반라의 모습으로 공중 앞에 나타나 춤추는 것을 심한 굴욕으로 여기시고, 부끄럽고 체면이 구겨진다고 느끼”곤 했을 정도였다.
가족의 인식이 이 정도였으니 일반 관객들은 두말할 나위 없었다. 1930년 9월호의 <별건곤>에 실린 기고문에서 최승희는 “무용 여하보다 반나체로 뛰어 나오는 최승희를 보고자 모이는 분이 많다”고 했고, 1931년 1월9일의 <매일신보>도 최승희의 무용이 관심을 끄는 것이 “예술을 찬미함”이 아니라 “벌거벗고 춤춘다는 것” 때문이라고 서술했다.
무용에 대한 이정도의 사회 인식이 팽배한 가운데 신무용 활동을 한다는 것은 무모한 일이었다. 처음 몇 번의 공연은 일본인들과 일본을 통해 개화의 물을 먹은 인텔리들의 후원으로 제법 성황을 이루었으나, 시간이 가면서 일반 대중의 관람은 줄어들었다. ‘반나체로 뛰어 나오는’ 공연을 자기들의 예술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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