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세계일 정체성>: ‘조선일일본일을 넘어서

 

19333월 최승희는 두 번째 도일 후 다시 이시이바쿠 무용단의 일원으로 무용 활동을 재개했다. 이 시기는 최승희가 조선무용을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평전들은 19335월의 <여류무용가대회>에서 발표된 <에헤야 노아라>를 그 효시로 보고 있다.

 

이후 최승희의 신작무용작품들 중에서 조선무용이 차지하는 비중은 급속히 높아졌고 <승무(1934)><검무(1934)>, <가면춤(1935)><조선풍의 듀엣(1935)> 등은 최승희의 대표작이 되었다. <서정시(리릭포엠, 1934)><희망을 안고서(1934)>, <길을 잃은 사람(1935)><마음의 흐름(1935)> 등의 현대무용 작품들도 일본 관객들의 찬사를 받았으나 압도적인 찬사는 조선무용에 쏟아졌다.

 

19341월 카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 1938:210)최승희가 일본일(日本一)”이라고 선언한 이래 최승희는 자타가 공인하는 일본 최고의 서양식 예술무용가로 떠올랐고, 막 결성되어 활동을 시작한 대규모의 화려한 소녀가극단에 못지않은 높은 인기를 누리는 무용가로 꼽혔다.

 

일본의 문호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일찌감치 최승희를 '일본일'의 신무용가로 선언했었다.

 

그러나 최승희의 목표는 일본일이 아니라 세계일(世界一)이었다. 1926년 이시이 바쿠의 제자 시절부터 최승희의 목표는 인도의 우다이 샹카르와 스페인의 아르헨티나와 같은 세계적인 무용가”(서만일, 1957(10):71)였고, 도쿄를 방문한 안나 파브로바, 이사도라 던컨, 마리 비크만 등의 정상급 무용가들이 추는 춤을 보고 무용적 움직임과 표현의 특색을 연구했다. (정병호, 1995:38). 1927년 경성공연에 참가했을 때도 일본에서 더 많은 실력을 쌓아 세계적인 무용가가 될 결심을 굳혔다(김찬정, 2003:50).

 

최승희는 19315월 안막과 결혼할 때도 세계 제일의 무용가가 되고 싶다고 자신의 포부를 털어놓았고(다카시마 유자부로, 1981:35; 강이향, 1993:87), 19333월 자존심을 접고 다시 이시이바쿠 문하로 들어간 것도 세계적 무용가가 되려면 도쿄에서 활동해야 한다는 인식 때문이었다(정병호, 1995:72). 최승희는 19354월 자전적 영화 <반도의 무희(1936)>의 대본작가 유아사 가츠에(湯淺克衛)에게 저는 반드시 세계 제일의 무용가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유아사 가츠에, 1952: 175). 최승희는 자신이 세계일이 되고 싶었을 뿐 아니라 딸 안승자가 엄마보다 더 훌륭한 무용가가 되어 세계를 돌아다니며 세계 제일의 무용가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소망까지 가졌다(다카시마 유자부로, 1981:71).

 

 

1930년대 중반, 최승희는 예술과 예능의 부문을 통틀어 가장 인기있는 일본일의 예술가였다.

 

최승희의 세계일 열망은 다른 사람들도 인정했다. 최승희의 <1회무용발표회>를 취재한 <신동아>기자는 최승희가 일본의 무용가로서만이 아니라 머지않아 세계의 무용가로서 활동할 것을 확신한다고 보도했고, 잡지 <개조>의 사장 야마모토 사네히코(山本實彦)19353월 대학을 졸업한 안막에게 최승희는 세계적인 무용가가 될 소질을 가지고 있으니 당신은 소설가가 된다는 생각을 버리고 최승희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권하면서 최승희를 후원하기 위해서는 사상운동에서도 손을 씻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설득했다(김찬정, 2003:137). 잡지 <백광(19374월호)>의 기자도 최승희여사 신문기라는 인터뷰 기사에서 최승희를 세계의 무희라고 불렀고, 야마모토 사네히코도 <삼천리(193512월호)>세계적 무희 최승희에게 전하는 말이라는 글을 기고했었다.

 

최승희의 세계일(世界一) 열망은 그가 가진 <조선인 신여성 예술가>라는 정체성에 바탕을 두었다. 그가 조선무용에 매진하고, 신무용의 요소를 가미한 것도, 오락과 연예로 빠지지 않고 예술무용에 정진한 것도 세계일열망을 실현하기 위한 토대가 되어 주었다.

 

일제강점기 조선인은 일본을 이기는 방법으로 세계일을 추구하곤 했다. 조선인들이 마라톤의 손기정과 남승룡, 권투의 서정권 등에 열광한 것도 세계일에 도전했거나 이뤄냈기 때문이었다. 최승희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세계일의 무용가가 되는 것이 일제의 차별을 보란 듯이 비웃어줄 유일한 방법이었다. 최승희가 자타가 공인하는 일본일의 무용가로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면서도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세계 순회공연을 시도한 것도 바로 이같은 민족정신이 원동력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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