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극장(中央劇場쥬오게키조, 1930-1936)>은 지금의 부산 동구에 개관된 세 번째 극장이었다. 초량정(=초량동) 207번지에 중앙극장을 개관한 극장주는 오이케 겐지(大池源二)<부산좌(1907-1923)><유락관(1921-1932)> 설립을 주도했던 오이케 츄스케(大池忠助, 1856-1930)의 아들이다.

 

오이케 츄스케는 카나모리 신기치(金森新吉)와 공동 경영하는 조건으로 중앙극장을 신축하던 중 사망해, 그의 장남인 오이케 겐지가 중앙극장을 승계 받아 완공한 후 1930722일 개관을 보았다. 개관 당시 중앙극장은 연극공연 극장으로 출발했으나 1936년 상생관의 대표 미츠오 미네지로(滿生峰次郞)가 인수하면서 극장명을 <대생좌(大生座다이세이자)로 바꾸면서 상설영화관으로 전환되었다. <1942-1943년의 영화연감(일본영화잡지협회 발간)>에 따르면 <대생좌>의 대표는 스기시타 스에지로(杉下末治郞)였다.

 

 

일제강점기 부산지역의 극장은 대체로 3시기로 구분되는데, 1(1885-1918)는 가부키 극장 시기, 2(1918-1928)는 활동사진 상설관 시기, 3(1929-1945)는 발성영화 상영관 시기이다. 오이케 츄스케는 각 시기에 맞춰서 극장을 개업한 것인데, 부산좌(1907-1923)가 제1, 유락관(1921-1932)이 제2, 중앙극장(1930-1945)이 제3기에 속하는 셈이다. 특히 중앙극장은 발성영화 시대가 열린 후 처음으로 개관한 극장이기도 하다.

 

1932년 발간된 <부산상공안내>에 따르면, 중앙극장의 수용인원은 상층 190, 하층 310, 500명이었는데, <1942-1943년의 영화연감(일본영화잡지협회 발간)>에는 각각 498명으로 기록되어 있어 일관성을 보인다. , 중앙극장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던 셈이다. 중앙극장의 입장료는 특등석 150, 1등석 120, 2등석 80전으로 책정되어 있었다.

 

필름 배급은 근거리에 있었던 상생관과 동시 개봉 시스템으로 운영되었으며, 뒤이어 소화관, 보래관과도 연계하여 동시에 영화를 개봉했다. 일본 영화는 쇼치쿠, 대도(大都), 키네마, 일본PCL, 신흥키네마, 닛카츠 계열사의 작품이 상영됐다. 중앙극장이 소재했던 초량 지역은 조선 사람이 밀집 주거했던 탓으로 홀대 받던 조선 영화가 자주 상영되었다.

 

 

이는 <중앙극장>을 뒤이은 <대생좌>도 마찬가지여서 조선인의 참여로 분위기가 한껏 달아오르곤 했다. 1962915일의 <국제신문>에 실린 부산, 어제와 오늘, 극장이라는 기고문에서는 <대생좌>의 흥행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전했다.

 

대생좌 꼭대기에서 나팔소리가 울린다. 구성진 가락으로 유행가가 흐른다. 분칠에 연지를 바른 극단패들이 꽹과리와 나팔을 앞장세우고 동네를 한 바퀴 돈다. 극장에 극단이 들어왔다는 선전인 것이다. 극장 문 앞에는 화려한 포스터가 나붙는다. <명창 이화중선(李花中仙)>, <줄타기광대 임상문>. 극장이 터져 나간다. 좌석제고 뭐고 없다. 이층은 신을 벗어 맡기고 올라간다. 다다미에 앉아서 구경한다.”

 

 

한편, <중앙극장(1930-1936)>에서 상영되었던 조선영화로는, 1932<방아타령>(31, 김상진), <금강한>(31, 나운규)을 시작으로 1934<아리랑>(26, 나운규), <아리랑2>(30, 이구영), 1936<홍길동전>(34, 김소봉), <춘향전>(35, 이명우), <장화홍련전>(36, 홍개명), <수일과 순애>(31, 이구영), <아리랑3>(36, 나운규) 등이 있었다.

 

이어서 개관한 <대생좌>의 조선영화 프로그램에는, 1937<홍길동전>(34, 김소봉), <홍길동전 후편>(36, 이명우), <나그네>(37, 이규환), <미몽>(36, 양주남), <풍운아>(26, 나운규), <무화과>(35, 나운규), <그림자>(35,나운규), 1938<무지개>(36, 나운규), <인생항로>(37, 안종화), <청춘의 십자로>(34, 안종화), <임자없는 나룻배>(32, 안종화), 1939<세동무>(28, 김영환), <개화당이문>(32, 나운규), <낙화유수>(27, 이구영), <청춘부대>(38, 홍개명), <국경>(최인규),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이명우), <무정>(박기채), <나의 친구여>(28,유장안), 1940<철인도>(30, 나운규), <큰무덤>(31, 윤봉춘), <회심곡>(30, 왕덕성), 1941<사나이>(28, 홍개명), <처의 모습>(39, 이창근), 1943<망루의 결사대>(이마이) 등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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