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8월22일 안본정에 부산의 13번째 극장으로 개관된 국제관(1920-1929)고 17번째 공연장으로 개관한 부산공회당(1928-1945)을 정리했다. 이 두 극장은 무용공연이 자주 개최된 극장이었기 때문에 비교적 자세히 살펴보았지만, 국제관과 부산공회당 개관 사이에 3개의 극장이 더 개관되었다. 유락관(遊樂館)과 태평관(太平館)과 수좌(壽座)가 그것이다.
유락관(遊樂館유라쿠칸, 1921-1932)은, 1921년 12월11일, 부산의 일본인 거류민 1세대 사업가이자 이미 부산좌(釜山座, 1907-1923)를 경영하던 오이케 츄스케(大池忠助, 1856-1930)가 좌천정(=동구 좌천동) 206번지에 개관한 다목적 극장이었다. 오이케 츄스케는 자본금 15만원, 불입금 3천5백원의 출자로 설립한 부산흥산(釜山興産)주식회사를 통해 유락관을 건축했는데, 주주 115명이 3천주를 보유해 설립된 부산흥산주식회사의 최대주주 오이케 타다스케는 1천280주를 보유한 최대주주였다.
유락관은 초량좌(草梁座소오리오자, 1914-1917)에 이어 부산 동구지역에 세워진 두 번째 극장으로 연극상연과 영화상영뿐 아니라 각종 지역 및 사회단체 행사를 개최하곤 했다.
조선인 관객과 공연에 배타적이던 대부분의 부산 극장들과는 달리 유락관은 조선인들의 공연과 관람에 개방적이었기 때문에, 유락관에서는 조선영화와 연극, 음악회와 각종 조선인단체 행사가 자주 열렸다. 특히 유락관 개관 직후인 1922년과 1923년에는 조선인 연극과 조선영화 등의 프로그램이 자주 소개되었다.
1922년 12월29일 부산청년회 주최로 변사 최천택을 초청해 <구미대모험사진> 상영회를 가졌고(조선일보, 1923년 1월2일), 1923년 3월6일에는 부산여자청년회의 연극 공연이 있었다. (동아일보, 1923년 3월17일). 1923년 5월5일에는 부산지방 배경의 위생선전활동사진이 상영되었고 (조선일보, 1923년 5월6일), 1923년 8월3일에는 부산청년회, 부산진기독청년회 주최로 교남학우회 순회연극이 상연되었고 (조선일보, 1923년 8월7일), 1923년 12월17일에는 조선여자교육협회 순회극단이 신극, 무도, 합창 등을 공연했다. (동아일보, 1923년 12월22일).
한편 박원표의 <향토부산(1967)>에 게재된 “부산의 흥행가”라는 글에서 “개화기에 있던 서울의 연극단들이 부산에 진출, ... 토월회가 이곳 무대(=초량좌)에서 그 연기를 자랑”하였다고 기술했으나, 여기에는 오류가 있어 보인다. 토월회 창립은 1922년이므로 1917년경에 폐관된 초량좌에서 공연할 수 있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토월회가 공연을 가졌던 것은 1921년 초량지역에 두 번째로 세워진 극장 유락관이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1926년에는 <아리랑(1926)>의 여주인공으로 유명해진 신일선의 가극이 공연되었는가 하면, 연속활극 <명금(1915)>이 유락관에서 재상영되었을 때는 서울에서 활동 중이던 동래 출신의 변사 서상호를 초빙해 대성황을 이루기도 했다.
유락관의 극장주 오이케 츄스케가 1930년 사망하자 경응의숙 이재과에 재학 중이던 장남 오이케 겐지(大池源二, 1892~?)가 부친의 사업을 승계 받아 유락관을 경영했고, 유락관 외에도 오이케 츄스케가 건축하기 시작한 부산 동구의 3번째 극장인 중앙극장(中央劇場주오게키조, 1930-1936)을 완공해 병행해 경영했다.
1936년 유락관은 상생관 극장주 미츠오 미네지로(滿生峰次郞)가 유락관을 인수해 대생좌(大生座다이세이자, 1936-1945)로 이름을 바꾸면서 활동사진 상설관으로 전환됐다.
유락관(1921-1930)은 기존의 부산좌(釜山座후산자, 1907-1923)와 보래관(寶來館호라이칸, 1914-1973), 행관(幸館, 1916-1930), 상생관(相生館아이오이칸, 1916-1945), 국제관(國際館고쿠사이칸, 1920-1929)과 함께 영업을 한 바 있고, 유락관을 뒤이어 개관된 태평관(太平館 타이헤이칸, 1922-1943), 수좌(壽座고도부키자, 1924-1945), 중앙극장(中央劇場주오게키조, 1930-1936), 소화관(昭和館쇼와칸, 1931-1945) 등과도 함께 존재했다.
유락관은 개관 10년만인 1932년 1월2일 발생한 화재로 극장이 전소된 후 폐관되었지만, 몇차례 유락관을 재건하려는 노력이 있었으나 복구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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