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이 바쿠는 1926년 3월28일 부산 <국제관>에서 가졌던 공연에서 1부 6번째 작품으로 <산을 오르다(山を登る, 1925)>를 발표했다. 이 작품은 듀엣 작품이었고 부산공연에서는 이시이 바쿠와 이시이 코나미가 출연했다.
<이시이바쿠 팜플렛 제1집>의 설명에 따르면 <산을 오르다>는 1925년 무사시사카이(武蔵境)의 이시이바쿠 무용연구소 시절에 창작된 작품이며, “극적 무용과 순무용의 중간 형태(劇的舞踊と純舞踊との中間にあるもの)”라고 분류되어 있다.
이시이 바쿠의 ‘극적무용’이란 “반드시 (과장이 섞인) 드라마틱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이야기라든가 줄거리가 있”는 무용작품을 가리키고, ‘순무용’이란 ‘무용시’를 가리킨다. ‘무용시’라는 용어는 이시이 바쿠가 함께 협력했던 야마다 코사쿠가 만든 말이었다. 두 사람은 1916년부터 1918년까지 협력해서 무용시를 안무했으나, 야마다 코사쿠는 1918년 월 뉴욕으로 떠나면서 무용 활동을 중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야마다 코사쿠가 미국으로 떠난 후 이시이 바쿠는 <도쿄가극좌>와 <도쿄오페라좌>를 차례로 설립해 이른바 <아사쿠사 오페라>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가극단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기고 오락무용의 경향이 짙어지자, 이시이 바쿠는 <도쿄오페라좌>를 해단하고 예술무용으로서의 ‘무용시’ 창작을 계속했다.
이어 이시이 바쿠는 유럽과 미국 순회공연(1922-1925)을 통해 자신의 신무용이 유럽에서도 환영을 받는 등 보편성을 가진 것을 확인하고, 귀국한 후에는 무사시사카이(1925년)와 지유가오카(1929년)에 무용연구소를 개설해 창작과 제자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 시기에 이시이 바쿠는 야마다 코사쿠와 공유했던 ‘무용시’라는 용어를 접고, 자신이 만든 용어인 ‘순무용’으로 대체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시이바쿠 팜플렛 제1집(1927년 7월)>에서 이시이 바쿠는 자신의 ‘순무용’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시적 감흥이 인간의 머릿속에 생겨났을 때, 그것을 말이나 글자의 힘을 빌려서 표현하면 시가 되고, 색채나 선의 힘을 빌려서 표현하면 그림이 되고, 소리를 통해서 나타낸 경우에는 음악이 된다. 그리고 이 감흥을 전적으로 신체 운동의 힘으로 표현된 것, 그것이 즉 진정한 무용이다.”
이시이 바쿠의 ‘순무용’은 용어는 다르지만 내용은 야마다 코사쿠의 ‘무용시’와 다르지 않다. 더구나 1930년 7월에 발행된 <이시이 바쿠 팜플렛 제4집>에는 ‘순무용’이라는 말이 사라지고 ‘무용시’라는 말이 다시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이시이 바쿠는 ‘순무용’이라는 말보다 ‘무용시’라는 말을 계속 사용하기로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이시이 바쿠가 <산을 오르다>를 “극적무용과 순무용의 중간형태”라고 분류한 것은 ‘남녀 두 사람이 함께 등산하는 이야기“를 표현하되 ”산을 오르는 과정에서 느끼는 다양한 서정적 감성 표현을 강조“했기 때문일 것이다.
<산을 오르다>는 에드바르 그리그(Edvard Hagerup Grieg, 1843-1907)의 악곡을 배경음악으로 사용했지만, 이시이 바쿠는 그것이 그리그의 어떤 곡인지 명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무용작품이 <솔베이지의 노래(1924)> 직후에 창작되었다는 점, 그리고 아마도 두 작품 모두에 그리그의 <페르 퀸트(1875)> 삽입곡을 사용했을 것임을 고려하면, <산을 오르다>의 음악은 그리그의 <산왕의 동굴(In the Hall of Mountain King)>일 것임이 거의 확실하다.
이 음악은 입센의 희곡 <페르 퀸트(1867)>의 2막에서 페르가 잉그리드를 납치하려고 산속을 헤매는 장면을 위해 작곡 되었는데, 이시이 바쿠는 이를 남녀가 등산하는 장면으로 변형시켰다.
<산왕의 동굴>은 원래 오케스트라 음악으로 작곡되었지만 피아노로 자주 연주되어 관객들에게 매우 친숙한 곡이다. 또 악곡의 길이도 약 2분40초 정도여서 ‘무용시’ 작품 <산을 오르다>에도 적절했을 것으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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