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이 바쿠의 부산공연 1부의 다섯 번째 발표 작품은 어린이무용(童踊) <개구장이(わんぱく小僧완파쿠고조, 1926)>였다.

 

이시이 무용단이 19263월에 가졌던 만주와 조선 순회공연의 레퍼토리 중에는 동용(童踊), 즉 어린이 무용이라고 분류된 작품이 2개 포함되어 있었다. 부산에서 공연된 <개구쟁이>와 경성 공연에서 발표된 <오늘밤은(今晩)>이었다. <개구장이>는 이시이 에이코(石井榮子, 1911-1936), <오늘밤은>마츠우라 다비토(松浦旅人, 1901-1927)가 공연했다.

 

 

이시이 바쿠가 어린이 무용에 관심을 갖고 창작하게 된 것은 두 가지 자극이 있었다. 하나는 야마다 코사쿠(山田耕莋)였다. 1914년 독일유학에서 돌아은 야마다 코사쿠는 한동안 이와사키 코야타(岩崎小弥太)의 후원으로 도쿄 필하모닉 교향악단을 지휘하며 활발하게 활동했으나 19155월 후원이 끊기고, 그해 9월에 결혼했던 나가이 이쿠코(永井郁子)와의 관계가 파국으로 끝나면서 시련의 시기를 맞았다.

 

이 시기에 야마다 코사쿠는 음악일기를 쓰면서 창작을 계속했고, 이시이 바쿠와 협력해 무용시 작품을 안무했다. 또 야마다 코사쿠는 이 시기에 함께 기거하던 누님의 두 자녀, 즉 자기 조카와 조카딸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19167월에 어린이를 소재로 한 피아노 소품 10곡을 집중 작곡해 <아이들과 삼촌(子供とおったん, 1917)>라는 피아노곡집으로 출판했다.

 

191611월에는 무라카미 키쿠오(村上菊尾, 후에 河合磯代카와이 이소시로, 1893-1982)와 결혼, 19174월에 장녀 미사(美沙)가 탄생하면서 어린이에 대한 야마다 코사쿠의 애정과 관심은 더욱 높아졌고, 그의 작품 중에 어린이를 소재로 하거나 어린이를 위한 음악이 많아졌다. 이 시기에 야마다 코사쿠와 함께 작업했던 이시이 바쿠는 그의 어린이 곡으로 어린이 무용(童踊)을 안무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린이에 대한 이시이 바쿠의 관심을 제고시킨 또 한 사람은 교육가 데즈카 기시에이(手塚岸衛, 1880-1936)였다. 192212월 이시이 바쿠는 유럽으로 가는 여객선 키타노마루(北野丸) 안에서 일본 자유교육의 창시자로 꼽히는 데즈카 기시에이를 만났다. 선실을 마주한 두 사람은 40일간의 항해 기간 동안 매일 얼굴을 맞대고 몇 시간씩 담론을 나누면서 자유교육에 협력하기로 약속했다고 한다. 데즈카 기시에이는 이시이 바쿠의 베를린 체류 기간에 그를 찾아오기도 했다.

 

1924년 이시이 바쿠가 도쿄에 돌아오자 데즈카 기시에이는 무사시사카이의 무용연구소로 찾아와 두 사람이 선상에서 토론한 이론의 실천을 위해 자신은 초등학교를, 이시이 바쿠는 그에 이웃해서 무용 연구소를 세우자고 제안했다. 두 사람이 선상 약속을 실천하기 위해 학교와 무용연구소를 나란히 설립한 곳이 바로 오늘날의 지유가오카(自由)였다.

 

데즈카 기시에이와 협력하면서 이시이 바쿠는 학생들의 건강을 위한 무용체조에 관심을 가졌고, 결국 전국의 소학교(=초등학교)에 무용체조를 보급하기 시작했다. 최승희는 때로 이시이 바쿠의 보조강사로서 전국에서 모여든 무용체조 교사들을 교육하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1926년 만주와 조선공연을 가졌을 때도 이시이 바쿠는 15개 내외의 레퍼토리 중에 2개의 아동무용을 포함시켰다. 경성 공연에서는 야마다 코사쿠의 음악을 배경으로 한 어린이 무용 <오늘밤은>을 발표했고, 부산 공연에서는 무음악 어린이 무용 <개구장이>를 발표했다.

 

<오늘밤은>을 공연한 마츠우라 다비토는 이시이 바쿠가 1920<도쿄오페라좌>를 창립, 운영했을 때 입단한 오사카 출신의 남성 무용수로, 이시이무용단의 1920-21년 일본 지방 공연과 1926년의 만주-조선 순회공연에 동행했다.

 

부산공연에서 <개구장이>는 이시이 바쿠의 막내 여동생 이시이 에이코가 공연했는데, 당시 최승희는 이시이 에이코의 무대 공연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을 것임에 틀림없었다. 최승희와 이시이 에이코는 둘 다 1911년생으로 동갑이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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