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16세의 일기><이즈의 무희>가 최승희의 도쿄 공연 활동과 맞물려 <16세 최승희> 신화를 영속시키는 계기가 되었다면, 프랑스에서는 에드가 드가(Edgar Degas, 1834-1917)의 조각 작품 <14세의 어린 무용수(La Petite Danseuse de Quatorze Ans, 1881)>는 최승희의 파리 공연에 즈음해 <14세 최승희> 신화를 만들어낸 것으로 보인다.

 

최승희는 19381월 샌프란시스코 공연을 시작으로 세계 순회공연을 시작했으나 그의 국적과 민족정체성 문제로 미국 공연은 실패로 돌아갔다. 특히 당시 일제가 중국 침략 전쟁을 시작했고 난징 대학살 소식이 미국과 유럽에 알려졌고, 특히 미국에서는 전국적인 일본상품 배척운동이 벌어져 일본 국적으로 순회공연을 시작한 최승희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미국에서의 실패를 뒤로하고 유럽으로 건너간 최승희는 파리에 도착한 직후부터 국적이나 민족정체성보다는 개인사를 홍보했다. 양반 출신인 그는 유럽에서 귀족 가문으로 홍보되었고, 기생을 천시하던 관행을 무시하고 무용가의 길에 들어선 것으로 인해 최승희는 아시아 여성운동의 선구자로 칭송되기에 이르렀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최승희는 파리에서 <14세 무용가>로 소개되었다. 그의 유럽 첫 공연이었던 1939131일의 <살플레옐> 공연의 팜플렛을 보면 2면을 전부 할애해 최승희를 길게 소개한 글이 게재되었는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

 

극동 최고의 무용가 최승희는 고색창연한 한국의 수도 서울에서 태어나 행복하고 열정적인 가정에서 자랐다. 14세에 숙명여고보를 졸업했다. 당시 그는 음악을 공부하려는 야망을 품었다. 교장은 그가 가수가 될 재능이 있음을 알아보고 학교의 장학금으로 도쿄 음악대학교에 보내기로 결정했지만 나이가 어려 서울에서 1년을 기다려야 했다.”

 

이 소개문은 조선이나 일본, 만주와 중국, 미국에서도 사용되었지만 한 가지 차이가 있었다. 최승희가 숙명여고보를 졸업하고 무용을 시작한 나이를 14세라고 명시한 것이다. 불과 3-4년전 일본어판 <나의 자서전(1936)>과 조선어판 <최승희 자서전(1937)>에서 최승희는 당시 자신의 나이가 15세였다고 밝힌 바 있었다. 어째서 프랑스에서는 14세라고 했던 것일까?

 

 

유럽식 만 나이를 계산했기 때문이다. 최승희의 생일이 19111124일이었다면 19263월의 나이는 만14(+4개월)이다. 이 생일이 음력날짜였다고 하더라도 실제 생일은 1912112일이 되므로 여학교 졸업 당시의 나이는 여전히 만14(+2개월반)이었다. 따라서 파리 공연 팜플렛에 그의 나이를 14세라고 쓴 것은 유럽식으로 정확한 나이 기술이었던 셈이다.

 

16세 여성과 14세 여성은 어감이 대단히 다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16세의 여성은 과년(瓜年) 혹은 과년(過年)이라며 성인 대접을 했지만, 14세라면 누구나 소녀를 연상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최승희는 왜 파리에서 <14세 무용가>라는 표현을 두드러지게 사용한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당시 파리에서 유명세를 타고 있었던 드가의 소조작품 <14세의 어린 무용수>와 연관시키기 위해서였던 것이 아니었을까? 무희를 작품 소재로 삼았던 드가는 유화와 드로잉 작품을 다수 남겼지만, 생전에 조각 작품을 전시회에 출품했던 것은 <14세의 어린 무용수> 하나뿐이었다.

 

 

이 작품이 1881년 파리에서 열린 제6회 인상파 전시회에 출품되었을 때 비평가들의 혹평을 받았다. 이 조각품의 모습은 그리 아름답지도 않았고, 이 작품의 모델이었던 14세 소녀 마리 반 구뎀(Marie van Goethem)도 벨기에 출신의 하류계층 무용수였기 때문이다. 당시 파리에서도 무용수는 창녀와 별반 다름없이 취급되는 천한 직업이었다. 비평가들은 예술의 전당에 아즈텍 인디언을 들여놓았다며 인종차별적 비평도 서슴지 않았다.

 

실망하고 분노한 드가는 전시회가 끝난 후 <14세의 어린 무용수>를 작업실에 옮겨와 처박아 두고, 두 번 다시 전시회에 내놓지 않았다. 1917년 드가가 사망한 후 <14세의 어린 무용수>는 다시 빛을 보았고, 1931년에는 오르세 미술관에 영구 전시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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