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16세 최승희신화를 일으키고 유지시킨 최대 공헌자는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 1899-1972)였다. 훗날 <설국(雪國유키구니, 1937)> 등의 작품으로 일본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1968)한 문호이자, 지금도 일본인들이 애호하는 10대 작가의 한 사람인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1930년대에도 이미 다수의 화제작을 발표한 주목받는 작가였다.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1934년 일본 종합문예지 <문예(文藝)> 11월호에 실린 무희 최승희론(舞姬崔承喜論)”이라는 기고문에서 최승희는 ... 여류 신진무용가 중에 일본일(日本一)”이라고 선언했다. 글 중에서 자신은 작가이지 무용 전문가는 아니라고 했지만, 그는 일찍부터 무용에 관심이 많았고, <이즈의 무희><무희> 등의 무용과 관련된 작품을 다수 발표해 주목을 받은 바 있었다.

 

일본일 작가에 의해 일본일의 무용가로 지목되었으니 일본 문화계가 최승희에게 주목했던 것은 당연했다. 최승희의 1930년대 중반 인기 급부상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일본일평가에 힘입은 바가 컸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최승희의 성공 신화와 함께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명성도 함께 올라갔을 테니 두 사람의 서로 칭찬하기는 대단히 효과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문예>무희 최승희론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일본일 무용가선언으로 유명해진 글이지만 그 글이 ‘16세 최승희신화의 기폭제가 되었다는 점은 그동안 지적되지 않았다. 4쪽 분량의 이 기고문에는 최승희가 무용을 시작했을 당시의 나이가 16세였음을 지적하는 내용이 무려 세 번이나 등장한다.

 

경성의 여학생인 최승희는 성악가로서 출세하고자 하였고, 동경음악학교에 입학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4년제 여학교를 졸업하고도 16세였던 까닭에 나이가 어려서 음악학교의 시험을 치를 수 없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 “무희최승희론,” <문예>, 193411월호, 155)

 

최승희가 오빠에게 이끌려서 입문하겠다고 이시이씨를 찾아왔을 때는 여학교 졸업 후 이틀째 되는 날이었다. ‘흑백의 조선 여학생복을 입은’ 16세의 그는 곧 이시이씨와 함께 출발하게 되었는데 기차의 창을 사이에 두고 어머니와 마주 하며 얼굴을 창에 내놓고 눈물을 줄줄 흘렸다’” (가와바타 야스나리, “무희최승희론,” <문예>, 193411월호, 155)

 

걸작 <에헤야노아라>와 같은 것은 일본의 <갓보레>와 같은 춤인데 술자리의 여흥으로 추는 춤에서 아버지의 그 춤을 보고 창작한 것이라고 한다. 8년 전에 16세라면 그는 아직도 너무 젊다. 천부의 체구와 재분을 충분히 펼 수 있는 세상에서 살게 하고 싶다.” (가와바타 야스나리, “무희최승희론,” <문예>, 193411월호, 157)

 

 

무희 최승희론은 문예 193411월호 153-158쪽의 6쪽이 걸친 기고문이지만 첫 쪽과 마지막 쪽은 1-2행의 짜투리에 불과하므로 실제로는 4쪽짜리 글이다. 그 짧은 글에서 최승희는 16라는 표현이 3번이나 사용된 것이다. 이는, 의식적 결과이든 무의식적인 실수이든, 작가에게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다. 그가 16세라는 나이에 집착했던 데에는 까닭이 있었던 것일까?

 

거기에는 고개를 끄덕일만한 사연이 있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어린 시절에 모든 가족을 잃었다. 1899년 오사카에서 태어난 그는 1901년에 아버지, 1902년에 어머니를 잃었다. 1906년에는 할머니를 잃었고 1909년에는 누나가 죽었다. 1912년 이바라키 중학교에 수석 입학했으나 1914년 할아버지마저 사망했다. 천애 고아가 되었을 때 그의 나이가 16세였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이바라키 중학교 시절부터 글쓰기에 재능을 보이고 있었는데, 할아버지를 잃었던 상황을 일기형식으로 기록했고, 이를 <17세의 일기>라는 단편소설로 만들어 <문예춘추> 19258월호와 9월호에 나누어 발표했다.

 

그러나 할아버지 사망 당시 자신의 나이가 만으로 14, 세는 나이가 16세였다는 점을 깨달은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1927년 단행본 <이즈의 무희(伊豆踊子, 1927)>에 이 작품을 포함시키면서 제목을 <16세의 일기>로 바꾸었고, 지금까지 그 제목으로 전해지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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