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도비문은 많은 실마리를 주지 않았지만 핵심 정보를 제공했다. 희생자들의 이름과 그들이 참여한 공사와 사망한 사고가 기록되어 있었다. 윤길문(尹吉文), 오이근(吳伊根)씨는 옛국철 후쿠치야마(福知山)선 개수공사 중에 다이너마이트 폭발사고로 사망했고, 김병순(金炳順), 남익삼(南益三), 장장수(張長守)씨는 고베수도가설공사 중에 터널붕괴사고로 사망했다고 했다.
다이너마이트 폭발사고는 신문기사로 확인되었다. 1929년 3월28일자 <고베신문>과 <고베유신일보>에 사고 상황과 희생자 명단이 보도되었다. 이번 조사에서 <아사히신문 도쿄판>과 <오사카아사히신문>의 기사도 추가로 발굴되었다. 전자는 도쿄 소재 일본국가기록원의 기록관리사 쿠누기 에나(功刀恵那)씨가 찾아 주셨고, 후자는 정세화 선생이 고베도서관에서 발굴하셨다.
서로 다른 시기에 서로 다른 사람들에 의해 발굴된 4개의 신문기사를 종합하면 이 다이너마이트 사고로 윤길문(21세), 오이근(25세)씨가 사망하고 윤일선(尹日善, 25세), 여시선(余時善, 19세), 오이목(吳伊目, 연령 미상)씨가 중경상을 입었는데, 피해자들은 모두 경상남도 고성과 통영 출신이었다.
다이너마이트 사고보다 15년 전에 발생했던 고베수도공사 터널붕괴사고에 대한 신문기사는 발견되지 않았다. 1910년대의 일간신문은 발행면수가 적었기 때문에 산간 오지에서 발생한 공사장 사고까지 보도되기 어려웠던 것 같았다. 그러나 김병순, 남익삼, 장장수씨의 사망 사실은 사고지역인 니시타니무라(西谷村)의 촌사무소가 발행한 매장인허증으로 확인되었다.
김병순씨의 매장인허증에는 그의 매장 일시가 1914년 8월3일 오후2시 이후로 명시되어 있었다. 오지에서 사고로 사망한 조선인 노동자 김병순씨의 장례가 3일장이나 5일장으로 치러졌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아마도 그는 8월2일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8월3일 오전에 매장인허증이 발행되자마자 당일 오후에 매장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매장인허증에 기록된 김병순(金炳順)씨의 한자 이름에 잘못이 있었다. 이름의 두 번째 글자가 ‘잡을 병(抦)’ 혹은 ‘자루 병(柄)’자로 보였지만, 이는 ‘빛날 병(炳)’의 오기였다. 한국에서는 ‘불 화(火)’변이 부가된 ‘빛날 병’자가 이름자로 가장 널리 사용되고 있고, 실제로 훗날 발굴된 족보 자료에서도 김병순씨의 이름을 ‘金炳順’으로 기록해 놓고 있었다.
매장인허증에는 김병순씨의 생년월일도 기록되어 있었는데 메이지(明治)16년, 즉 1883년 5월19일이었다. 따라서 사망 당시 김병순씨의 나이는 만31세(+약3개월)였다.
김병순씨의 최종거주지 주소는 카와베군(川邊郡) 니시타니촌(西谷村)의 타마세(玉瀨)였다. 번지수는 나와 있지 않았지만 당시 거주 인구가 많지 않았을 이 지역에서는 이 정도의 주소만으로도 신원을 밝히기에는 충분했을 터였고, 우편물도 제대로 배달되었을 것이다. 아마도 김병순씨의 최종 주소지는 그 지역의 조선인 노동자 합숙소(이른바 함바飯場)였을 가능성이 크다.
김병순씨의 한국 내 연고를 찾기 위해 필요한 가장 중요한 정보는 본적지 주소였다. 매장인허증에는 “조선 강원도 강릉군 북일리(北一里) 대천동(大天洞)”라고 되어 있었다. 즉 김병순씨의 고향은 강원도 강릉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1914년 8월3일에 작성된 이 주소를 오늘날의 주소로 바꿀 수 있다면 김병순씨의 연고지를 찾을 길이 열리는 것이다.
다만 이 주소에 이상한 점이 있었다. 도(道)와 군(郡), 리(里)와 동(洞)이 명시된 것은 좋으나 ‘군’과 ‘리’ 사이에 면(面)이 빠져 있었다. 그리고 오늘날의 강릉시 지명 중에는 ‘대천동’이라는 이름이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일제강점 이후 1백여년 동안 조선의 지역 구획과 지명 변동이 많았으므로 그 계보를 차분히 조사해 나가면 실마리가 발견될 것으로 여겨졌다. 지금으로서는 ‘김병순씨의 고향이 강릉’이라는 점이 밝혀진 것만도 대단한 소득이었다.
일본 매장인허증에 본적이 ‘강릉’으로 명시되었더라도 그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다. 강릉의 호적이나 족보 기록을 찾아 일본과 한국의 기록이 일치하는지 확인해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 기록이 반드시 완전하거나 확실하다고 보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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