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희의 나주공연을 조사한다고는 하지만 처음부터 기대는 그리 높지 않았다. 지금까지 나주 공연에 대한 문헌이 발견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의 신문과 잡지에는 ‘최승희의 나주공연’에 대한 보도가 단 한 건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나주공연이 없었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당시의 지역 문헌은 거의 다 사라진 상태이고, 남은 문헌은 중앙지의 지방판에 난 기사들뿐이기 때문이다. 중앙지의 지방 기사는 그 수도 적고, 그나마 사회나 경제 기사가 우선권을 차지했다
직접적 문헌증거 없이 조사를 시작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 다양한 분야의 문헌에 삽화나 에피소드로 잠깐잠깐씩 등장하는 세세한 내용들을 모두 긁어모아야 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나는 이 조사에 참여해 줄 나주인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이틀의 의논과 부탁 끝에 다섯 분을 나의 첫 나주 선생님으로 모시게 되었다. 올해 광주항쟁 기념행사에 참석했다가 만났던 홍양현 선생과 그의 소개로 나주에서 만났던 임재택 선생님, 그리고 김순희, 정찬용, 최현삼 선생들께 도움을 청했다. 대략의 계획을 말씀드리자 모두 수락해 주셨기에 우선 카카오톡에 단톡방을 만들고 <나주극장 프로젝트>라고 이름을 붙였다. 조사를 최승희 선생의 공연에만 한정하지 않고, 1930년대 나주의 극장들을 전체적으로 조사해 보기로 했기 때문이다.
홍양현 선생은 영화 <홍반장(2004)>의 홍반장 같은 사람이다. 이 영화의 원래 제목은 아주 길어서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 홍반장>이다. 영화에서 김주혁이 그러는 것처럼, 나주의 어디선가 누군가에게 무슨 일이든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나는 사람이 홍양현 선생인 것 같다. 그의 대표 직함은 자신이 창설한 청소년 특별활동 프로그램 <나주학교>의 교장이지만 그의 활동이 <나주학교>에 국한되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그는 ‘나주인’이라는 말을 ‘나 주인’이라고 띄어 쓰면서 ‘나주 사람들은 내가 주인인 사람들’이라고 설명해 주었는데, 재치와 어거지가 반반 섞인 느낌이기는 했지만, 말 한마디를 가지고도 깊이 생각하는 성격과 사소해 보이는 꺼리에서 멋진 이야기를 끌어내는 능력이 엿보였다.
나는 이원영-정연진 선생 부부와 함께 올해 5월 광주항쟁 기념제의 사전 행사에 참석했다가 홍양현 선생을 처음 만났는데, 그날 밤 그가 광주의 <가객>에서 시전한 시낭송에 홀딱 반했다. 이후 6월에 있었던 여순항쟁 유적지 답사에 동행했다가 일행과 떨어져 나주에 갔는데, 그때도 홍양원 선생은 <초록추어탕> 한 켠에서 김영일 선생의 질펀한 공연을 마련해 주었다.
내가 최승희 전남지역 공연을 조사 중이라는 말에 홍양현 선생은 어떻게든 도움이 되어 주려고 애썼다. “최승희가 나주공연은 안했소?”했던 그의 질문이 이번 프로젝트의 시발점이었다.
홍양현 선생은 나주가 경제적 풍요와 예술적 풍성함을 이어온 천년 역사의 고장이므로 그에 걸맞는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견해가 확고한 사람이다. 최승희 선생이 목포와 광주에서 공연하면서 나주 공연을 건너뛰었다면 홍양현 선생은 섭섭했을 것이다. 이번 조사는 홍양현 선생의 섭섭함이 근거 없음을 보이려는 시도일 지도 모르겠다.
홍양현 선생은 나주에서 아는 사람들이 가장 많은 사람에 속한다. 그의 인맥과 소통의 네트워크는 이번 <아치의 노래> 나주 상영회에서도 증명되었다. 대규모의 거창한 상영회는 아니지만 그가 일단 ‘옳은 일’이라고 판단하면서 일은 시작되었다. 일을 벌이되 마무리가 약하다는 평이 있긴 한데, 그가 해온 일들이 명분 있는 일임을 잘 아는 친구와 선후배들이 그의 약점을 잘 보강해 준다. 이번에도 <실학강독회> 회원들이 상영회와 뒷풀이를 든든하게 뒷받침해 주는 바람에 좋은 결과를 낳은 것 같다.
2022년 정태춘 선생의 노래가 나주인들의 심금을 울릴 수 있었다면, 90년 전 최승희 선생의 무용 공연도 그랬을 것이다. 홍양현 선생 같은 나주인들과 함께 의논하면서 느리더라도 꾸준하게 최승희 선생의 나주공연을 조사해 볼 작정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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