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또 시작되나 보다. 나주 때문이다. 겨우 세 번 방문으로 나는 나주에 완전히 매료됐다.
나주의 수려한 산수 때문일 지도 모르겠다. 영산강은 도도하고 금성산은 웅장하니까. 혹은 도시 구석구석 깃든 긴 역사의 흔적과 그 안에서 새로 솟는 에너지 덕분이기도 할 것이다. 당당한 나주목 금성관과 생기 넘치는 호수공원이 그 증거이다.
하지만 나주의 진짜 매력은 사람이다. 펜실베니아 랭카스터와 텍사스 코퍼스크리스티에서도 그랬고, 스페인 피니스테라와 남프랑스 앙티베에서도 그랬다. 홋카이도 쿠시로와 오키나와 나하에서도 그랬고, 강원도 강릉과 경상남도 통영, 전라남도 벌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고장이 기억에 남는 것은 그곳에서 맺고 얽혔던 인연 때문이다. 매력의 핵심은 항상 사람이다.
나주라고 예외일 리 없다. 1천년의 역사를 만들어온 것도 사람이고, 지금의 에너지를 내뿜는 것도 사람이다. 내가 나주에서 만난 남자들은 뭔가 불만에 찼지만 박력 있었고, 여자들은 이상하리만치 당차면서 아름다웠다.
그뿐 아니다. 나주에는 제3의 부류라고 해야 할 ‘이상한 사람들’이 많다. 이상하다고 해서 비정상이라는 말은 아니다. 평범하지 않다는 뜻이다. 나는 나주 첫 방문 때부터 이상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내가 나주에 푹 빠졌다면 박력 있는 남자들이나 아름다운 여자들 때문이라기보다는 바로 이 이상한 사람들 때문일 것이다.
나주와 나주 사람들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조반니노 과레스키의 옴니버스 <돈 까밀로와 빼뽀네>를 떠올리곤 했다. 포(Po)강 유역의 바싸(Bassa)는 영산강변의 천년 고도 나주의 이탈리아판이다. 까밀로 신부와 빼뽀네 읍장, 스미르쪼와 비지오, 브루스코와 팔케토와 지고또, 스트라치아미와 스포키아 등이 엮어내는 바싸 사람들 이야기는, 내가 아직 세세하게 모르기는 해도, 천년 동안 이어온 나주 사람들의 이야기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수려한 나주의 산수에 살면서 이상한 나주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요즘도 세계 각국의 여행자들이 <돈 까밀로와 빼뽀네>의 영화 촬영지 브레스쉘로(Brescello)를 방문한다고 한다. 책으로 다 읽은 이야기지만 그곳에 가면 과레스키가 그려내었던 바싸 마을 사람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자꾸 나주에 가는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나주인들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으려면 나주에 가야하는 것이다.
외지인이 나주에 빠져들기가 쉬울 리 없다. 나주에 푹 빠지고 싶어 한다고 다 받아들여지는 것도 아닐 것이다. 어떤 공동체의 일부가 되고 싶으면 자기 역할이 있어야 한다. 일시적이든 영구적이든, 자기 역할이 자기 존재의 근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늘 해오던 일을 나주에서도 해보기로 했다. 무용가 최승희 선생의 혼적을 나주에서도 확인해 보기로 한 것이다. 그 일이 성공할는지 미리 알 수 없다. 성공한다고 해도 그게 나주와 나주 사람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내가 할 줄 아는 것이 그것밖에 없으니 말이다.
최승희 선생의 나주 공연 조사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나는 이미 1931년의 최승희 전라도 순회공연 일정을 재구성한 바 있는데, 그해 최승희 선생은 전주(11월29일), 군산(30일), 목포(12월4일), 광주(5일), 그리고 벌교(6일)에서 공연을 단행했다. 목포공연 다음날 광주공연을 가졌던 것으로 보아 나주공연은 없었던 것으로 단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전라남도 순회공연이 1931년 11월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1930년과 1932년에도 전라도 순회공연을 했고, 세계 순회공연을 떠나기 전인 1937년에도 조선 지방공연을 단행한 바 있었다. 따라서 나주 공연을 조사할 여지는 아직도 많이 남아 있는 셈이다.
이 글은, 수필이나 감상문 형식이더라도 내용은 최승희 나주공연 조사의 리서치 노트이다. 엉뚱하거나 중구난방일 수 있고, 결론이 어떻게 날지, 혹은 결론이 나기는 할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자료와 사유와 의견을 정리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고 시작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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