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세 번째로 나주를 방문하기 이틀 전인 2022년 7월7일 나주에서 좌담회가 하나 열렸다. <나주극장>의 문화재생을 위한 좌담회라고 기사화되었다. 장소는 <나주극장> 옆의 나주 신협 본점 주차장이었고, 시간은 오후 7시였다. 좌담회 날짜는 주말이 아닌 목요일인데, 시간은 저녁 7시였다. 7월7일7시, 이 한 가지만으로도 주최 측이 매우 애를 쓴 흔적이 읽혀진다.
좌담회의 목적은 <나주극장>의 성공적인 문화재생 공간을 조성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좌담회를 알리는 일부 기사에는 퇴락한 <나주극장>의 오늘날 모습과 함께 주최 측이 제작한 것으로 보이는 포스터도 게재되었다. 그런데 나는 이 포스터를 보면서 뭔가 불편했다.
포스터에 쓰인 커다란 “談場”이라는 한자 때문이다. 이 한자의 폰트크기는 다른 어떤 글자보다 4-10배 이상 컸기 때문에 눈에 얼른 띌 수밖에 없다. 의도는 이해가 된다. 한국어로 읽으면 ‘담장’이지만 한자로 읽으면 ‘이야기 터’라는 뜻이니, 역설과 반전을 노린 표어일 것이다.
하지만 제작자의 의도가 제대로 전달되려면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포스터를 보는 사람이 한자 談자와 場자를 ‘담’과 ‘장’이라고 읽을 줄 알아야 하고, 그 각각이 ‘대화’와 ‘터’라는 뜻임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이 역설과 반전, 그리고 그 포스터 제작자의 재치를 이해할 수 있다.
문제는 요즘 젊은 세대는 한자를 모를 뿐 아니라, 아주 싫어한다는 점이다. 중국을 얕잡아 보거나 싫어하는 일부 젊은이들의 심리도 한자를 경시하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지금 40대에 도달해 중년에 진입하는 세대도 학교에서 한자를 ‘필수과목’으로 배운 적이 없다. 그런 배경을 가진 젊은 세대에게 한자는 결코 매력적인 언어나 효과적인 전달매체가 아니다.
그런데도 공공포스터에 한자를 쓴다는 것은 “젊은 세대는 빠져라”는 선언이나 다름없다. 커다란 한자 옆에 작은 글씨로 ‘담장’이라고 써놓아도 소용없다. 읽을 수 있어도 뜻을 모르면 말짱 도루묵이기 때문이다. 담장’이라는 한글 대신 ‘이야기 터’라고 번역을 해 놓아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談場이라는 한자를 쓸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이 ‘담장(談場)’은 그 ‘담장(-牆)이 아니라면서도 포스터의 배경 사진은 담쟁이덩굴에 뒤덮인 육중한 담장이다. 혼란은 가중된다. 그 담장이 아니라면 담장 사진을 쓸 것이 아니라, 중요한 사건 때마다 나주 사람들이 한데 모여 의논하고 행동에 돌입했던 금성관 앞 광장 사진이나, 하다못해 고대 그리스의 아크로폴리스 사진이라도 써야 하는 게 아니었을까?
그런데 이런 소통상의 문제점보다 약간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 이런 식의 표기는 “한자는 중요한 시니피앙(signifiant)”이지만 “한글은 불완전한 보조적 시니피에(signifié)”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한글 반포를 저지하려고 거듭 상소를 올리던 집현전 학사들의 마인드는 6백년이 지난 지금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심지어 나주에서도 말이다.
그러나 이 한자 문제를 국수주의로 끌고 가고 싶지는 않다. 다만 그 한자 키워드를 젊은 세대가 이해하기 힘들 것이라는 점을 지적할 뿐이다. “왜 ‘담장’이지?” 하며 의아해 하는 젊은이들에게 ‘한자를 알아야 뜻을 알 수 있다’고 재삼 재사 설명해야 한다면, 이 포스터의 기능은 원래 의도와는 달리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공공포스터의 목적은 공중 일반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다.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가 함께 이해할 수만 있다면 외래어든, 외국어든, 영어든, 일본어든, 타갈로그어이든 스와힐리어든, 어떤 말이든 사용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포스터의 구성요소가 특정 계층을 소외시키는 쪽으로 제작된다면 그 포스터는 본래 목적을 달성하기 어려울 것이다.
<나주극장> 문화재생 프로그램을 성공시키기 위해 좌담회를 연 것은 환영할 일이다. 젊은이들도 좌담회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할 수 있다면 더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아가 청년들이 문화재생 사업에 직접 참여하고, 그 혜택을 누릴 수 있다면 더더욱 좋을 것이다.
기성세대는 젊은이들이 지역사회 현안에 관심이 없다고 한탄하는 경향이 있지만, 청년들이 관심을 갖고 참여할 수 있는 조건과 기회를 마련하는데 더 애써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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