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홍영(1997)씨는 2년여의 문헌조사와 현지답사를 통해 남익삼씨가 거주했던 합숙소의 위치와 그가 일했던 작업장을 추론의 수준에서나마 특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남익삼씨가 구체적으로 어느 터널 공사에서 어떤 사고로 사망했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 아무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정홍영씨는 코요칸(紅葉館)>의 안주인 마츠모토 아야미(松本文美, 78)씨로부터 터널공사 사고에 대한 간략한 증언을 얻을 수 있었을 뿐이었다. 마츠모토 아야미씨는 터널에서 발파 사고로 부상자가 꽤 많았다면서, 피해자들은 온 몸에 돌이 박혀서 오늘은 세 명, 내일은 다섯 명이라는 식으로 피투성이가 되어 의사에게 실려 가곤 했다고 말했다.

 

 

정홍영씨는 터널 사고를 조사하면서 동시에 3명의 조선인 희생자들의 매장지를 찾았다. 이들의 사망 후에 대해서도 아무 기록이 없었으므로 주로 니티타니 지역의 원로들을 찾아 탐문을 계속했다. 오랜 탐문 조사의 과정을 정홍영씨는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내가 니시타니에 몇 번이나 발길을 옮긴 것은, 터널 공사의 현지조사나 증언 청취 말고도 또 하나의 목적이 있었다. 그것은 매장지를 찾는 일이었다. 니시타니에는 예로부터 '참배묘()''매장묘()'의 두 가지 묘제를 유지하는 풍습이 최근까지 남아 있다. 사람이 죽으면 먼저 '매장묘'에 토장을 하고 (참배하는) 묘는 다른 곳에 세우는 것이다.

 

니시타니 사무소에서 발급한 허가증도 화장이 아닌 매장인 이상 틀림없이 니시타니 어딘가에 묻혀 있을 것이었다. 이 지역 사찰의 과거 기록을 뒤지고 묘지를 돌아보면서 묘비나 무연고 묘소를 찾아보기도 했지만 그럴듯한 장소를 확인할 수 없었다.”

 

이 글을 읽으면서 필자는 억울한 죽음을 당한 조선인 노동자들의 매장지를 찾아 그 넓고 험한 니시타니 산간지역을 찾아 헤매던 정홍영 선생님의 모습이 떠올랐다. 얼마나 막막하셨을까?

 

 

그러나 생각해 보니 위안되는 점도 있었다. 정홍영 선생님은 아마도 콘도 도미오(近藤富男, 1950-2022) 선생과 동행하셨을 것이다. 두 분은 항상 같이 조사하고 같이 연구하시던 단짝 파트너이셨기 때문이다. 20001월 정홍영 선생이 돌아가신 후 그를 추모하는 글에서 콘도 도미오 선생은 나는 그의 금붕어 똥이 되었다고 쓰신 적이 있을 정도였다.

 

1986년 가을, 마침내 정홍영 선생과 콘도 도미오 선생은 남익삼씨를 포함한 3명의 조선인들이 묻힌 매장지를 찾아냈다. 니시타니(西谷)의 오하라노(大原野)에 거주하던 향토사학자 미쓰쿠니 히카리(光国光) 씨의 도움으로 니시타니의 공동묘지 터를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1986년 초가을의 어느 날, 미쓰쿠니 씨로부터 매장지를 알 수 있을 것 같다는 전화 연락을 받았다. 다음날 나는 미쓰쿠니 씨와 함께 차를 몰아 그 매장지로 향했다. 타마세의 묘지에서 조금 떨어진 나지막한 산속으로 들어가니 아직 어린 밤나무가 가득 심어져 있어 아무리 봐도 사람이 묻힌 매장지로 여겨지지는 않았다.

 

미쓰쿠니 씨의 설명에 따르면 이 산은 옛날부터 마을의 공유지였으며 농가에서 기르던 소나 말이 죽었을 때 묻는 '말 무덤(馬墓)'이었다고 한다. 사람이 죽으면 처음에는 타마세의 묘지 아래쪽 공터에 묻었지만, 장소가 좁아지자 이 말 무덤 옆에 차례차례 묻었던 일이 지역 원로들 사이에 자세히 전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정홍영 선생은 마침내 3명의 조선인 노동자들이 묻혀 있는 곳을 찾았으나, 수십 만 명의 고베 시민에게 생명수를 보내는 공사에 자신의 목숨을 바친 사람들의 매장지라고 볼 수 없을 만큼 초라했다. 흙이 덮인 곳에 풍화된 돌들이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아 그곳이 버려진 지 오래된 묘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정홍영 선생은 자신의 소회를 이렇게 덧붙였다.

 

나는 말없이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80년의 긴 세월을 그들은 어떤 생각을 하며 이 땅에 잠들어 있는 것일까. 돈을 벌려고 먼 곳에서 왔다가 목숨을 잃은 (일본) 사람들과 멀리서 바다를 건너와 타향에서 죽어 소와 말의 무덤에 묻힌 조선인들의 억울한 마음이 가슴 속에 전해지는 듯했다. 나는 그저 마음속으로 손을 모으고 그들의 명복을 빌 뿐이었다.” (2022/9/6, j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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