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글에서 해방 직후 효고현 히메지시 아가미야와 도쿄시 아다치에서 국어(조선어)강습소가 매우 이른 시기에 문을 열었다는 기록을 살펴보았고, 도쿄시 칸다의 조선YMCA 조선강습회와 신주쿠의 도츠카 한글학원도 초기의 국어강습소로 소개했습니다.

 

그런데 나고야시를 비롯한 아이치 지역에도 국어강습소 설립이 활발했고, 시기적으로도 매우 이른 시기였다고 조언을 주신 분이 계셨습니다. 그래서 또 조사해 봤습니다.

 

 

<이어> 201611월호는 아이찌현에서는 해방 후부터 1947년까지 32개의 국어강습소와 초등교육의 장이 생겨났고, 아동·학생 수는 약 4,800명에 달했다고 했습니다. 아이치현에서만 학생 수가 4,800명이었다고 하니 엄청난 규모입니다. 2020년 현재 일본 전역의 조선학교 학생수가 5천명 이하라는 통계가 있는 것을 보면, 당시 아이치현의 국어강습소와 초등학원의 규모와 열기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서술에는 모호한 점이 있습니다. 19451015일 조련이 결성되었고, 조련의 지도 아래 19464월부터 국어강습소를 통폐합하여 초등학원들을 설립해 나갔으니까, 이 통계에는 국어강습소와 초등학원의 통계가 섞여 있는 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치현에서도 많은 국어강습소가 설립되었다는 점은 분명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편 <아이치 조선중고급학교 60년의 역사(2006년 발행)>에 따르면 아이치 조고 제1기생인 김종진(金宗鎭, 당시 80)씨는 “9살 때에 해방을 맞았으니까요. 9살 여름, 처음으로 우리학교(조선학교)를 다녔다고 회상했습니다.

 

 

1945년 여름에 우리학교를 다녔다고 하셨으나 이는 아마도 국어강습소였을 것입니다. 당시에는 우리학교라는 말이 생기기도 전이었기 때문입니다. 또 한반도보다 따뜻한 일본에서도 여름이었다면 9월 중순까지였을 것입니다. 9월 중순 이후였다면 가을이었을 테니까요.

 

그렇다면 아이치현에서도 해방(1945815) 직후 915일경 사이에 이미 국어강습소가 설립되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 아이치에서도 히메지와 도쿄에서와 비슷한 초기에 이미 국어 강습소가 설립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한편, 칸몬(関門)지역과 후쿠오카(福岡)에도 국어강습소가 많이 설립됐습니다. 칸몬지역이란 혼슈 최서단의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下關)에서 큐슈 후쿠오카현 모지(門司)에 이르는 좁은 해협 지역을 가리킵니다. 일본에서 대한해협을 건너 조선으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거치는 곳이므로 해방 직후 조선인들이 귀국을 위해 구름떼처럼 모여들었던 곳입니다.

 

 

또 노가타(直方)와 구루메(久留米), 이이즈카(飯塚)와 타가와(田川), 치쿠호(筑豊)와 카호군(嘉穂郡) 등을 포함한 후쿠오카현에는 250개 이상의 탄광이 있던 지역입니다. 1939년 이래 조선인들이 대규모로 강제 연행되었던 곳으로, 치쿠호 탄광지역에만 15만명의 조선인이 살았습니다.

 

해방 후 칸몬지역과 후쿠오카 현에도 국어강습소가 만들어졌습니다. <이어> 201610월호는 “1947년까지 와카마츠(若松), 모지(門司), 야하타(八幡), 토바타(戸畑), 후쿠오카(福岡)를 비롯해 10개 지부 내에 초등학원(소학교)이 세워졌다고 서술했고, 20211월호는 치쿠호 지역에서는 타가와, 쵸쿠안(直鞍) 지역 내 13개소에서 민족교육이 실시되었다고 서술했습니다.

 

초등학원이란 조련이 국어강습소를 통페합하여 세운 초등학교를 가리키며, 치쿠호 지역에 설치되었다는 민족교육 13개소란 국어강습소를 가리켰던 증언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해방 직후 도쿄를 비롯한 간토지역, 그리고 오사카와 효고현을 포함하는 간사이 지역뿐 아니라 나고야를 포함한 아이치현, 칸몬지역의 야마구치현과 후쿠오카현의 탄광지대에 이르기까지, 무수히 많은 국어강습소가 세워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국어강습소들은 해방 직후인 19458월 말부터 9월까지 비온 뒤의 대나무 순처럼 설립되어서 귀국을 준비하는 조선인들에게 오래 잊혔던 조선어를 가르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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