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무용신 캠페인이 끝났을 무렵 콘도 도미오 선생님께서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의 희생자 다섯 사람의 한국내 연고를 찾아달라고 부탁해 오셨습니다. 희생자들의 가족과 친척들에게 이 다섯 분을 우리가 잘 모셔왔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정세화 선생님으로부터 콘도 도미오 선생님이 두 차례나 희생자들의 연고를 찾기 위해 한국을 방문하신 적이 있다는 말씀도 들었습니다. 그만큼 추도비 주인공들의 연고를 찾는 일이 콘도 도미오 선생님께 절실한 과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콘도 도미오 선생님을 직접 만난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과묵하신 분이고, 평소에는 말씀이 별로 없으시지만, 일단 말씀을 꺼내셨다면 그 일이 중요하다는 뜻이며, 한번 마음먹은 일은 아무리 시간이 걸려도 꼭 이루어내시는 분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의아했습니다. 나는 이 분야의 전문가도 아닌데 어째서 이 일을 내게 부탁하신 것일까? 내게 익숙한 사회학 분야도 아닐 뿐 아니라, 이제 막 친숙해져 가는 조선무용이나 조선학교의 문제도 아니어서, 추도비는 제게 완전히 새로운 분야였습니다. 초심자나 다름없는 내게 이런 부탁을 하신 것이 의문이었습니다.

 

콘도 도미오 선생님은 제가 일본말을 못하면서도 일본 전역을 다니면서 8-90년 전의 최승희 선생의 기록을 찾아내는 것이 신기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한국에서의 조사에는 더 능숙하지 않겠느냐고 짐작하셨던 것 같습니다.

 

 

제가 연구와 조사에 익숙해져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평생 연구소와 학교에 근무하면서 조사연구와 집필로 단련되었다고나 할까요? 그러나 더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 일밖에는 다른 할 줄 아는 게 별로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걱정은 되었습니다. 최승희 선생은 당대 최고의 예술가였기 때문에 그의 공연은 어디에서나 신문과 잡지의 뉴스거리였습니다. 일본의 대도시뿐 아니라 중소도시의 도서관이나 기록보관소에서도 최승희 선생과 관련된 기록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반면 추도비의 주인공들은 알려진 것이 거의 없는 분들입니다. 토목공사 막노동자들의 신상이나 생활이 기록의 소재가 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신문에 기사화되는 것은 그들이 목숨을 잃은 경우가 유일했습니다. 그나마 사고 기사가 전부일 뿐, 사고 희생자들의 사후가 어떠했는지 알리는 후속보도가 있을 리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조사에 착수했습니다. 다섯 분이 모두 사고로 사망하셨기 때문에 적어도 사고 기록은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더구나 무용신 캠페인과 최승희 연구를 도와주신 것에 대한 작은 보답이라도 된다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일단 지금까지 수집된 기초자료를 보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라인 단톡방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의사소통은 실시간으로 이뤄질 수 있었고, 바로 답이 왔습니다. 정세화 선생님은 딱 한부 남은 부친 정홍영 선생님의 저서를 특급우편으로 우송해 주셨고, 콘도 도미오 선생님도 <무쿠게통신>에 게재되었던 글들을 전해 주셨습니다.

 

 

정홍영 선생님의 저서 <가극의 거리의 또다른 역사: 다카라즈카와 조선인>3부로 구성되었는데, 그중 1부의 1,2장과 3부의 자료편이 도움이 될 것으로 보였습니다.

 

콘도 도미오 선생님이 알려주신 <무쿠게통신(むくげ通信)>의 글은 모두 다섯 개였습니다. 노무나가 마사요시 선생님의 <사람사람: 정홍영 인터뷰(115)>, 호리우치 미노루 선생님의 <신문기사로 보는 무코강 개수공사와 조선인(153)>, 히다 유이치 선생님의 <정홍영 선생의 죽음을 애도하며(178)><효고의 재일조선인사 연구를 다시 시작하자(256)>, 그리고 곤도 도미오 선생님의 <정홍영씨와의 일(300)> 등이었습니다.

 

이 자료들이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의 주인공들을 조사하는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