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 단지동맹 기념비>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안중근 의사와 11명의 동지가 맺은 단지동맹에는 이름이 있었습니다.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입니다. 이는 손가락을 자른 <동의회(同義會)>의 동지들의 모임이라는 뜻입니다. 손가락을 자른 것은 목숨을 걸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동의단지회>는 곧 <동의회>의 결사대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동의회>19084월 연해주에서 결성된 조선의 의병조직입니다. <동의회> 결성에는 짧으나마 전사(前史)가 있습니다. 일제가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한 1907년 겨울, 애국계몽운동을 포기하고 연해주로 망명한 안중근(安重根, 1879-1910)은 평안도 경무관(=대한제국의 경찰관) 출신의 김기룡(金起龍, ?-?), 함경북도 경흥 출신으로 러시아군 복무경력을 가졌던 엄인섭(嚴仁燮, 1875-1936)과 의형제를 맺고, 함께 항일의병을 일으키기 위해 연해주 각지의 동포사회를 방문, 뜻있는 청년 87명을 모으고, 총기와 자금도 확보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을 <87형제>라고 불렀습니다.

 

 

이듬해(1908) 4, <87형제>단원들은 연추 하리의 최재형(崔在亨, 1860-1920) 선생의 집에 모여 의병단체 <동의회>를 조직했습니다. 이때 연해주 고려인의 지도자 최재형 선생이 동의회의 총장, 변계경무서(邊界警務所=국경수비대) 출신으로 간도(間島)관리사를 역임했다가 연해주로 망명한 이범윤(李範允, 1856-1940)이 부총장,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의 특사로 파견됐던 이위종(李瑋鍾, 1884-?)이 회장, 엄인섭이 부회장, 그리고 백규삼(白圭三, ?-?)이 서기로 선임됐습니다.

 

 

<동의회>는 신속하게 연해주에서 의병을 조직하고 무장을 갖춰 19087월 국내진공작전을 감행했습니다. 동의회 의병은 3천명에 이르렀고, 총사령관인 도영장(都營將)은 전제익(全濟益), 좌영장(左營將)은 엄인섭(후에 일본 밀정으로 변절), 우영장(右營將) 안중근이 맡았습니다. 그밖에도 무기조달을 담당한 병기부는 김대련(金大連, 후에 일본 밀정으로 변절)과 최영기(崔英基), 군비마련을 담당한 경리부는 강의관(姜議官)과 백규삼이 담당했습니다.

 

 

<동의회>가 창립 4개월 만에 3천명에 달하는 의병을 조직할 수 있었던 것은 군자금을 넉넉하게 모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동의군의 초기 군자금은 이위종이 부친인 주러공사 이범진(李範晉)의 명령으로 전달한 1만루불과 최재형이 사재로 출연한 13천루불, 그리고 수청(지금의 파르티잔스크) 지역의 한인들이 모금한 6천루불을 포함 약 3만루불에 달했습니다. 1908년의 3만루불은 2015년 기준 미달러화로 86만달러(금값 기준), 한국 원화로는 약 10억원에 달하는 액수였습니다.

 

 

<동의회>의 의병부대는 50명 단위의 소대별로 국내진공작전을 개시했습니다. 안중근은 우영군 사령관으로 4개 소대 약 200명의 <동의군>을 지휘하고 77일 포시에트항을 떠나 두만강을 건넜고, 총사령관 전제익의 지휘 아래 같은 숫자의 <동의군>이 이를 뒤따랐습니다. 같은 시기에 이범윤이 창군한 <창의군>도 국내진공작전에 참여했는데, 지휘관 우덕순이 12개 소대 약 6백명을 지휘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당시 국내진공작전에 참여한 의병은 <동의군>이 약 4백명, <창의군>이 약 6백명으로 총 1천여병의 군대가 작전에 투입된 것이었습니다.

 

 

2개월의 국내진공작전은 초기에는 성공적이었으나 일본군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실패했고, <동의군>은 대부분의 병사를 잃고 8월말에 연추로 귀환했습니다. 안중근은 인도적 차원에서 일본군 포로를 방면한 것이 패전의 원인으로 지적되어 곤경에 처했고, 국내진공작전이 실패로 돌아가자 연해주의 무장독립투쟁의 열기는 급속히 냉각되었습니다.

 

 

대규모 의병 조직과 국내진공이 난관에 부딪히자, 안중근의 제의로 결성된 것이 <동의단지회>입니다. 전면전과 게릴라전이 어렵게 되자 암살단을 조직한 것이지요. 안중근과 함께 단지동맹에 참가한 김기룡, 백규삼, 엄인섭 등이 <동의회>의 간부였다는 점도 단지동맹이 <동의회>의 소규모 핵심단체였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그리고 <동의회><동의단지회>는 모두 최재형 선생의 연추하리 집에서 설립되었고, 그의 재정지원을 받았던 것이지요. (jc, 2024/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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