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수리스크의 고려인문화센터에는 역사전시관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1860년대 고려인의 연해주 초기정착 시기이래 고려인 이주사를 보여주는 각종 자료가 소개되는 전시관입니다.

 

 

고려인역사관의 전시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1) 19세기 이전 고려인의 생활문화사, (2) 고려인의 항일투쟁사, 그리고 (3) 고려인의 노래 아리랑 등이 그것입니다. 전시 공간은 연해주 고려인의 삶과 역사를 보여주는 물품과 사진, 동영상 등 자료 160여 점으로 꾸며져 있는데, 19세기에 고려인들이 사용했던 신선로, 담뱃대, 수저 등도 볼 수 있습니다.

 

 

고려인역사관은 200910월 동북아평화연대의 지원으로 문을 열었는데, 당시 전시 내용은 강제이주와 항일투쟁이 중심이었습니다. 그러나 201612월 이주 초기의 자료와 최근 시기의 자료들을 보강해 역사관의 전시 내용이 포괄적으로 개선됐다고 합니다.

 

 

고려인 이주사의 초기정착기(1864-1905)와 독립운동과 러시아혁명기(1905-1923), 그리고 소비에트 시기(1923-1937)는 고려인에게 고난의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고려인은 한민족의 문화를 지키고 예술을 간직하면서 고난을 견디고 이겼습니다.

 

 

이는 고려인역사관의 아리랑 자료실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한과 흥이 어우러진 한민족의 노래이자 한민족 문화의 근간을 이루는 아리랑에 관한 많은 자료가 전시되어 있는데, 그중에는 아리랑을 수록한 각종 민요집과 가요책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역사관의 아리랑 관련자료 전시 서가에 깜짝 놀랄만한 자료가 있었습니다. 최승희 선생의 공연 팜플렛입니다. 한국에서는 물론 일본 취재를 위해 방문했던 49개 도시의 어떤 도서관이나 기록보관소에서도 찾을 수 없었던 희귀한 공연 프로그램입니다.

 

 

최승희 공연 자료를 우수리스크의 고려인역사관에서 발견하니, 너무 놀랍고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다른 방문단원을 불러서 이 자료를 소개하자, 다들 신기해하면서 팜플렛과 함께 사진들을 찍었습니다.

 

 

흥분이 가라앉으면서 의문이 떠올랐습니다. 이 공연 팜플렛이 왜 아리랑 자료로 전시되어 있을까? 그래서 프로그램의 안쪽에 수록된 공연의 연목들을 찬찬히 읽어봤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 공연 제2부의 여섯 번째 작품의 제목이 <아리랑의 선율>입니다. 아리랑을 편곡해서 최승희가 자신의 제자 김민자와 듀엣으로 공연한 작품입니다. 최승희 선생도 아리랑의 후예이자, 아리랑에 맞춰 조선무용을 창작했던 예술가였던 것이지요.

 

 

그동안 제가 진행해 온 조사내용에 따르면, 최승희 선생은 사할린에서 공연한 적이 있었지만, 연해주에서는 공연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최승희 선생의 공연 프로그램이 우수리스크의 고려인역사관에 전시된 것일까?

 

 

팜플렛 표지를 보니까, 1937220-21일에 경성 부민관에서 열렸던 공연의 팜플렛입니다. 당시 최승희 선생은 세계 순회공연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프로그램의 표지에도 도구고별(渡歐告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유럽으로 건너가서 순회공연을 하기 전에 고국의 팬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공연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또 의문이 생깁니다. 1937년 서울 공연의 팜플렛이 어떻게 우수리스크까지 건너와서 20245월에 고려인역사관의 서가에 전시되어 있는 것일까.

 

 

이는 역사관의 큐레이터를 만나 이 프로그램의 이동경로(provenance)를 물어야 하는 문제이지만, 담당자는 출근하지 않았고, 방문단 일행도 이내 문화센터를 떠나 다음 방문지로 향해야 했습니다. 최승희 공연 팜플렛의 이동경로 조사는 후일을 기약할 숙제가 되었습니다.

 

 

이번 방문의 주요 목적이 <최재형 고려인 민족학교>의 안정과 발전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지만, 고려인역사관에서 발견한 최승희 선생의 경성공연 팜플렛 때문에 이번 방문의 의미가 열배로 늘어난 것 같은 벅찬 느낌이었습니다. (jc, 2024/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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