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첫 댄스홀은 1917년 요코하마 쓰루미(鶴見)의 카게츠엔(花月園)이었습니다. 원래는 레스토랑이었는데, 댄스홀이 병설되었다가, 이내 댄스홀 전업으로 바뀌었습니다. 이후 사교댄스는 들불같이 번져서 1923년경 도쿄도에만 56개소의 댄스홀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전에도 사교댄스는 있었습니다. 1891년부터 매년 천장절(=텐노 탄신일)에 맞춰 제국호텔에서 무도회가 열렸는데, 이 행사에는 일본 황족과 귀족이 참석했고, 외교사절이 초청됐습니다.
1922년부터는 제국호텔의 <라이트관>에서 무도회가 열렸고, 이때에도 외교 사절이 초청되어 사교댄스가 이뤄졌습니다. 이같은 무도회는 상류사회의 사교장이었고, 음악도 미뉴엣이나 왈츠 등의 서양 클래식 춤곡이었습니다.
사교댄스를 대중오락으로 보급한 것이 댄스홀입니다. 카게츠엔은 일반인들이 남녀 동반으로 입장해 구미의 사교댄스를 즐겼던 곳입니다. 이내 간사이(關西)에도 댄스홀이 생겼습니다.
1920년 오사카의 남바(難波)에 카페 <코티지(コテージ)>가 개업했습니다. 술과 음료를 파는 카페였으나, 댄스홀을 겸했는데, 1923년 관동대지진 이후 전문 댄스홀이 되었습니다. 코티지 댄스홀이 성공하자 1924년 도톤보리(道頓堀)와 센니치마에(千日前)에 <파울리스타(パウリスタ)>, <유니온(ユニオン)>, <아카타마(赤玉)>등의 댄스홀이 개업했습니다. <코티지> 이후 3년 동안 오사카에는 20개소 이상의 댄스홀이 생겼습니다.
댄스홀의 음악은 재즈가 대종이었습니다. 오사카의 댄스홀에서는 레코드로 음악을 틀었지만, 오래지 않아 도쿄에서 옮겨온 재즈 밴드들이 오사카 댄스홀의 음악을 담당했습니다. 댄스홀의 중심지가 간토에서 간사이로 옮겨온 것이지요.
비슷한 방식으로 고베에도 댄스홀이 생겼습니다. 모토마치(元町)의 <소셜(ソシヤル) 댄스홀>, 나니와마치(浪花町)의 <다이야(ダイヤ) 구락부>, 산노미야쵸(三宮町)의 <캐피탈(キャピトル) 무도장>과 키타나가사도리(北長狭通り)의 <하나쿠마(花隈) 댄스홀> 등이 그것입니다.
1926년 말 오사카의 댄스홀들이 대대적인 규제를 받았습니다. 텐노가 사망해 장례가 진행 중인데도 댄스홀이 성업 중이었던 것이 당국의 눈에 거슬렸기 때문입니다. 풍속을 해친다는 신문기사가 계속 나고, 경찰의 단속이 이어지면서, 오사카의 댄스홀들이 잦아들고, 그대신 한신국도 연변을 따라 효고현의 아마가사키에 댄스홀들이 옮겨갔습니다.
1927년 <아마가사키 댄스홀(尼崎ダンスホール)>을 시작으로 1930년까지 <쿠이세(杭瀬)댄스홀>, <킹(キング)댄스홀>, <한신회관 댄스팰리스(阪神會館ダンスパレス)>가 차례로 개업해, 아마가사키가 일본 사교댄스의 중심지가 됐습니다.
간사이 댄스홀들은 독특한 영업방식을 개발했습니다. 요코하마의 <카게츠엔>에서는 입장객이 파트너를 대동해야 했지만, <코티지> 등의 오사카 댄스홀은 미리 여성 댄서를 고용해 두어서, 남성들이 파트너를 대동할 필요가 없게 했습니다.
남성들은 입장할 때 티켓을 삽니다. 한 장에 20전이고, 10장씩 묶은 회수권은 2엔이었습니다. 낮에는 반값이었습니다. 음악이 시작되면 남성들은 댄스홀 앞쪽에 앉아 기다리는 댄서들에게 가서, 티켓을 건넵니다. 댄서는 티켓을 건넨 남성과 1곡의 춤을 춥니다. 댄서가 티켓을 거절할 수 없고, 여러 남성이 티켓을 건넬 경우에는 여성 댄서가 파트너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댄서들의 평균 연령은 22-3세. 고급 이브닝드레스를 차려입은 모던 걸입니다. 춤을 잘 추고, 키가 큰, 미인 댄서에게 티켓이 몰립니다. 유명 댄스홀의 간판 댄서는 댄스 테크닉, 외모, 서비스가 일류였다고 합니다. 이들은 대기석에 앉는 자리부터 다릅니다. 최고인기 댄서는 중앙에 앉는데, 인기 순위는 전월의 티켓 판매량으로 정해집니다.
티켓 판매 수입은 60%가 댄스홀, 40%가 댄서 몫입니다. 댄서들의 수입은 월평균 7-80엔, 인기 댄서는 200엔을 벌었다고 합니다. 참고로 1930년 대졸 취업자 초임이 약 70엔이었습니다. 같은 나이의 남성 최고 직업 소유자들보다 3배 수입을 올렸던 것이지요.
댄서들은 요즘의 아이돌 같은 존재였지만, 많은 수입에도 불구하고 넉넉히 살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인기순위를 올리기 위해 댄서들끼리 무한 경쟁을 해야 했고, 미용과 의상 등에 많은 돈을 써야했기 때문입니다. 빚에 허덕이는 댄서들이 많았고, 남성 패트론(=기둥서방)에게 종속된 댄서도 많았다고 합니다.
2만엔짜리 다리 보험에 들었던 우네 마사코 같은 무용수는 극히 예외적인 존재였을 것입니다. 혹은 그런 보험 가입이 무용수의 유명세를 올리려는 이벤트였는지도 모르죠. (jc, 2024/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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