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그 다음 작품은 <칼춤> 혹은 <검무>이다. 프로그램은 이 작품을 전사의 기사정신은 조금씩 사그러들었지만 최승희의 춤이 위축된 정신을 불러 일으켜 활발하게 고양시킨다고 설명하고 있다.

 

<검무(1934)><에헤야 노아라(1933)>, <승무(1934)>와 함께 최승희가 창작한 초기 조선무용 작품이다. 칼춤은 신라시대 황창의 영웅적인 행위를 칭송하기 위한 목적의 빠르고 힘있는 무용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주로 기생들에 의해 주안석에서 연희되는 방식으로 계승되는 바람에 빠르고 힘찬 원형은 잦아들고 칼의 교묘한 움직임을 위주로 하는 섬세한 춤으로 변했다고 한다. 최승희는 이를 다시 원형에 가깝게 복원하여 장쾌하고 쾌활한 춤으로 재창작했다는 것이다.

 

<검무> (Danse de l'Epée)


이는 최승희가 조선 전통무용의 고증을 위한 자세한 리서치를 추진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 강준식(2012, 118-120)은 최승희가 19335<레이조카이>가 주최한 여류무용대회에서 발표한 <에헤야 노아라>가 폭발적인 성공을 거둔 데에 힘입어 새로운 조선무용을 창작하기 위해 심형을 기울였다고 서술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선 고전문헌에 대한 리서치가 필요했는데, 그같은 고증 작업에는 남편 안막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고 서술했다.

 

강준식이 그 한 가지 예로 든 것이 바로 <칼춤>이었다. 안막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경상도 정주부 인물조에 기록된 신라시대 황창(黃昌)의 고사를 찾아냈고, 거기에서 <칼춤>의 모티브를 찾아냈다. 황창의 칼춤이 백제 저잣거리에서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결국 백제왕을 살해하기에 이르렀을 정도로 호전적이고 전투적인 것이었다고 해도, 실제로 그것이 어떤 모양으로 연기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에 안막은 다시 정약용의 시선집에 실린 <무검편증미인> 부분에서 칼춤에 대한 기록을 찾아 주었다.

 

안막이 정약용의 칼춤을 번역해서 읽어주었을 때 최승희는 그 시가 주는 감동만 가지고도 혼자서 칼춤을 출 수 있었다고 한다. 북한의 <문학신문(1961620)>에 실린 <무용과 문학>이라는 기고문에서 최승희는 이렇게 썼다. “이 시는 그 동작묘사에서 얼마나 선명하고 생동한가? 이 시를 읽으면 칼춤을 모르는 사람도 칼춤을 만들 수 있고 칼춤을 출 수 있으리라고 본다.”

 

 

그러나 정약용의 <칼춤>에도 섬세함과 부드러움이 주조를 이루고 있어서, 황창 검무의 장엄하고 용맹스러움을 복원시키려면 또 다른 영감이 필요했다. 이에 안막은 이덕무와 박제가가 정조의 명을 받아 집필한 <무예도보통지><무예도>를 찾아왔다. 여기에는 무기를 다루는 동작을 비유법으로 설명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용이 바다에서 뛰어오르는 기세라거나 붉은 봉새가 날개를 펼치는 기세혹은 엎드린 호랑이의 기세로 일격을 가하는 형세등의 서술이 그것이었다. 이러한 기록은 실제 동작을 서술한 것이라기 보다는 비유법을 주로 사용한 것이지만, 최승희는 이런 비유적 서술을 통해 오히려 더 생생한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해서 최승희의 검무는 직선적이고 폭이 큰 춤사위와 발산적인 힘의 분출, 사지의 예리한 뻗침과 탁탁 끊기는 춤사회가 두드러졌으며 검무라고 해서 이렇게 칼을 가지고 무사 비슷하게 갑옷 같은 것을 입고 장화에 뿔같은 모자를 둘러쓰고 샷샷샷하고 춤추던 모습으로 완성되었던 것이다.

 

,